대학내일
미안하지만 유감이에요
‘미안’ 하지는 않으련다.
술잔 위로 전에 없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토록 적극적으로 증발해버리고픈 술자리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나 갈래.”
얼마간의 침묵을 깨고, 증발 욕구 유발자 중 한 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안도의 한숨이 입술 사이로 비질비질 새어 나왔다. 발딱 일어나서 그를 쿨하게 배웅했다.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빤히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부러 또박또박 눈을 맞추고 이야기했다.
“유감이에요.”
나름의 화룡점정이었다. 그날의 자리는 예기치 못했던 조합이었다. 새로 알게 된 사람을 만났고, 역시나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와 어쩌다 보니 우연히 합쳐진(?) 자리였다. 모든 구성원이 어색한 사이였기에 합석이 이상할 법도 했건만, 언제나 그렇듯 주(酒)님에겐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다’라고 믿게 하는 고유의 힘이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를 사이에 둔 새로운 두 지인의 예상치 못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안주 없이 넘긴 깡소주만큼이나 분위기가 쓰디 썼다. 어찌할 수 없이 번져가던 그 기 싸움과 말다툼 속에서 술자리는 멋들어지게 깽판이 났다. 내가 만든 자리는 아니었으나, 두 사람의 연결 고리가 나였기에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다음 날, 사과의 뜻을 전해온 두 사람 모두에게 다시 한 번 나의 입장을 확고히 밝혔다. 나는 어제의 상황이 심히 ‘유감’이었다고.
예전이었다면 ‘유감’ 대신 내가 먼저 ‘죄송’이라는 카드를 꺼냈을 것이다. 내가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그 자리를 억지로 만든 당사자도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불편한 마음에 일찍이 사과했을 것이다. “아유, 이렇게 돼서 어떻게 해요. 죄송해요.” 대체 무엇이 죄송하다는 건지도 모른 채 말이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의 나는 사과하는 대신 정확히 ‘유감’을 표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된다면 그 또한 ‘유감’이겠지만 말이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사과할 범주의 것이 아니라고 나는 판단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과에 사용하는 단어의 종류는 꽤 많다. ‘미안’, ‘죄송’, ‘송구’ 외에도 ‘잘못’, ‘용서’, ‘양해’, ‘유감’ 등등. 전에는 이 어휘들이 대부분 비슷한 이음동의어라고 생각했다. ‘Yellow’라는 단어 하나를 ‘노랗다, 샛노랗다, 노르스름하다, 노르끼리하다’ 등등 으로 다양하게 표현해 구글 번역기를 통쾌하게 엿 먹이는 한글의 위대함 정도로만 치부했던 것. 당연하게 ‘유감’과 ‘죄송’을 구별해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디 유감과 죄송은 다르다. 한자 뜻을 풀어서 살펴보면 ‘유감’은 ‘마음에 꺼림직함이 남았다’라는 뜻이고 ‘죄송’은 ‘나의 허물이 두렵고 당황스럽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같은 점은 둘 다 마음이 좋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것은 화자의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하지만 내가 본질적으로 문제 삼고자 했던 바는 정확한 어휘 사용 따위가 아니었다. 나의 과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불편함이 싫어 사과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원활한 관계를 위한 사과이기보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미봉책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가장 최악은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진 경우, 바로 나의 케이스였다.
이 빌어먹을 슬픈 습관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내가 보였다. 지금은 직장인의 신분을 내려놓은 상태이지만, 나는 과거 5년간 직장 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대부분 ‘을’의 꼬리표를 달고 일했다.
From 출근 to 퇴근, 나는 사과할 일이 많았다. 그중 많은 것들이 나의 과오가 아닌 일들이었다. 프로젝트로 진행되던 업무는 유관 부서의 다른 담당자들과 함께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최종적으로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역할은 거의 내가 맡고 있었다. 모든 일은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 당연하게 매일같이 문제가 터졌고, 그만큼 사과해야 하는 일도 넘쳐났다.
입사 초기에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내게 주어진 업무가 사과라면, 사과의 신이 한번 되어봐야지 않나 싶었다. 유선과 메일, 대면 등의 각기 다른 채널(?)에서 불같이 화가 난 상대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효과적인지 나름의 진지한 연구(?)를 거듭했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나의 사과 스킬은 종국에는 후배들과 타 팀 동료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세포 가득 열정이라는 것이 불끈대던 시절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렀다. 타오르던 열정은 정해진 순서처럼 시나브로 활기를 잃어갔다. 무조건적인 사과를 악용하는 이른바 ‘갑질’ 덕분이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은 진리와도 같았다.
온종일 내 잘못이 아닌 일들에 대해 사과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수긍해야만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태생적으로 높았던 자존감에 보이지 않는 구멍들이 뚫렸다. 자존감에도 뼈가 있다면 보나마나 골다공증 말기였다.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을 기계적으로 놀려 영혼 없는 사과 메일을 쓰고, 아무렇지 않게 딴짓을 하며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통화를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수없이 내뱉던 나의 사과는 ‘진심’의 알맹이가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퇴사를 했다.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동반사적인 급사과의 잔재는 질긴 습관으로 남았다. ‘사과 머신’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버릇을 떨치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반사적인 사과가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한 템포 물러나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첫걸음이었다.
용서를 구하기 전, 지금 이 순간이 사과해야 할 상황인지, 단지 유감을 표해야 할 때인지, 도리어 상대에게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했다. 모든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으레 그렇듯 처음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차츰 익숙해지니 예상치 못했던 긍정적 효과가 발견되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때 화가 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유감이라 생각했었는데 깊게 곱씹어 반추해보니 내 쪽에서 사과를 해야 하는 경우도 발견했다. 무엇보다 그것이 사과이든 유감이든 간에 잠시 멈춰 생각한 후에 답을 내놓는 것은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도 나도 한 김 식은 후 대화를 하는 것이 관계에 도움이 될 때가 더 많았다.
혹자는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사과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반문할 수 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나 또한 때로 유감인 때조차 사과할 때가 있다. 꼭 그래야만 하거나, 그러고 싶은 순간들이다.
그럼 어떻게 그 기준을 설정하느냐고? 솔직하게 밝혀보건대, 이 ‘기준’을 찾고 잡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고, 때때로 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이 ‘사과의 기준’은 훗날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 변화하고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 생각한다. 패치가 계속 깔리는 소프트웨어 버전같이.
앞으로도 이 업그레이드 작업을 적극적으로 행할 작정이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는다. 서른둘의 5월 늦봄. 지금 이 졸고를 쓰고 있는 순간의 기준은 ‘사과 32.05’ 버전쯤 될까? 몇 년이 흐른 후 내가 쓴 이 글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련다.
얼마간의 침묵을 깨고, 증발 욕구 유발자 중 한 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안도의 한숨이 입술 사이로 비질비질 새어 나왔다. 발딱 일어나서 그를 쿨하게 배웅했다.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빤히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부러 또박또박 눈을 맞추고 이야기했다.
“유감이에요.”
나름의 화룡점정이었다. 그날의 자리는 예기치 못했던 조합이었다. 새로 알게 된 사람을 만났고, 역시나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와 어쩌다 보니 우연히 합쳐진(?) 자리였다. 모든 구성원이 어색한 사이였기에 합석이 이상할 법도 했건만, 언제나 그렇듯 주(酒)님에겐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다’라고 믿게 하는 고유의 힘이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를 사이에 둔 새로운 두 지인의 예상치 못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안주 없이 넘긴 깡소주만큼이나 분위기가 쓰디 썼다. 어찌할 수 없이 번져가던 그 기 싸움과 말다툼 속에서 술자리는 멋들어지게 깽판이 났다. 내가 만든 자리는 아니었으나, 두 사람의 연결 고리가 나였기에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다음 날, 사과의 뜻을 전해온 두 사람 모두에게 다시 한 번 나의 입장을 확고히 밝혔다. 나는 어제의 상황이 심히 ‘유감’이었다고.
예전이었다면 ‘유감’ 대신 내가 먼저 ‘죄송’이라는 카드를 꺼냈을 것이다. 내가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그 자리를 억지로 만든 당사자도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불편한 마음에 일찍이 사과했을 것이다. “아유, 이렇게 돼서 어떻게 해요. 죄송해요.” 대체 무엇이 죄송하다는 건지도 모른 채 말이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의 나는 사과하는 대신 정확히 ‘유감’을 표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된다면 그 또한 ‘유감’이겠지만 말이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사과할 범주의 것이 아니라고 나는 판단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과에 사용하는 단어의 종류는 꽤 많다. ‘미안’, ‘죄송’, ‘송구’ 외에도 ‘잘못’, ‘용서’, ‘양해’, ‘유감’ 등등. 전에는 이 어휘들이 대부분 비슷한 이음동의어라고 생각했다. ‘Yellow’라는 단어 하나를 ‘노랗다, 샛노랗다, 노르스름하다, 노르끼리하다’ 등등 으로 다양하게 표현해 구글 번역기를 통쾌하게 엿 먹이는 한글의 위대함 정도로만 치부했던 것. 당연하게 ‘유감’과 ‘죄송’을 구별해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디 유감과 죄송은 다르다. 한자 뜻을 풀어서 살펴보면 ‘유감’은 ‘마음에 꺼림직함이 남았다’라는 뜻이고 ‘죄송’은 ‘나의 허물이 두렵고 당황스럽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같은 점은 둘 다 마음이 좋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것은 화자의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하지만 내가 본질적으로 문제 삼고자 했던 바는 정확한 어휘 사용 따위가 아니었다. 나의 과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불편함이 싫어 사과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원활한 관계를 위한 사과이기보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미봉책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가장 최악은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진 경우, 바로 나의 케이스였다.
이 빌어먹을 슬픈 습관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내가 보였다. 지금은 직장인의 신분을 내려놓은 상태이지만, 나는 과거 5년간 직장 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대부분 ‘을’의 꼬리표를 달고 일했다.
From 출근 to 퇴근, 나는 사과할 일이 많았다. 그중 많은 것들이 나의 과오가 아닌 일들이었다. 프로젝트로 진행되던 업무는 유관 부서의 다른 담당자들과 함께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최종적으로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역할은 거의 내가 맡고 있었다. 모든 일은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 당연하게 매일같이 문제가 터졌고, 그만큼 사과해야 하는 일도 넘쳐났다.
입사 초기에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내게 주어진 업무가 사과라면, 사과의 신이 한번 되어봐야지 않나 싶었다. 유선과 메일, 대면 등의 각기 다른 채널(?)에서 불같이 화가 난 상대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효과적인지 나름의 진지한 연구(?)를 거듭했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나의 사과 스킬은 종국에는 후배들과 타 팀 동료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세포 가득 열정이라는 것이 불끈대던 시절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렀다. 타오르던 열정은 정해진 순서처럼 시나브로 활기를 잃어갔다. 무조건적인 사과를 악용하는 이른바 ‘갑질’ 덕분이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은 진리와도 같았다.
온종일 내 잘못이 아닌 일들에 대해 사과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수긍해야만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태생적으로 높았던 자존감에 보이지 않는 구멍들이 뚫렸다. 자존감에도 뼈가 있다면 보나마나 골다공증 말기였다.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을 기계적으로 놀려 영혼 없는 사과 메일을 쓰고, 아무렇지 않게 딴짓을 하며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통화를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수없이 내뱉던 나의 사과는 ‘진심’의 알맹이가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퇴사를 했다.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동반사적인 급사과의 잔재는 질긴 습관으로 남았다. ‘사과 머신’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버릇을 떨치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반사적인 사과가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한 템포 물러나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첫걸음이었다.
용서를 구하기 전, 지금 이 순간이 사과해야 할 상황인지, 단지 유감을 표해야 할 때인지, 도리어 상대에게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했다. 모든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으레 그렇듯 처음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차츰 익숙해지니 예상치 못했던 긍정적 효과가 발견되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때 화가 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유감이라 생각했었는데 깊게 곱씹어 반추해보니 내 쪽에서 사과를 해야 하는 경우도 발견했다. 무엇보다 그것이 사과이든 유감이든 간에 잠시 멈춰 생각한 후에 답을 내놓는 것은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도 나도 한 김 식은 후 대화를 하는 것이 관계에 도움이 될 때가 더 많았다.
혹자는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사과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반문할 수 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나 또한 때로 유감인 때조차 사과할 때가 있다. 꼭 그래야만 하거나, 그러고 싶은 순간들이다.
그럼 어떻게 그 기준을 설정하느냐고? 솔직하게 밝혀보건대, 이 ‘기준’을 찾고 잡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고, 때때로 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이 ‘사과의 기준’은 훗날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 변화하고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 생각한다. 패치가 계속 깔리는 소프트웨어 버전같이.
앞으로도 이 업그레이드 작업을 적극적으로 행할 작정이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는다. 서른둘의 5월 늦봄. 지금 이 졸고를 쓰고 있는 순간의 기준은 ‘사과 32.05’ 버전쯤 될까? 몇 년이 흐른 후 내가 쓴 이 글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련다.
Illustrator 키미앤일이
Writer 위선임 yabandoju30@naver.com
자발적 삶을 위한 선택적 백수. 믿음, 소망, 사랑 중 개그를 제일로 칩니다.
Writer 위선임 yabandoju30@naver.com
자발적 삶을 위한 선택적 백수. 믿음, 소망, 사랑 중 개그를 제일로 칩니다.
#용서#사과#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