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구원은 셀프
“사람은 결국 혼자야."
이상형을 물어보면 ‘뒷모습이 쓸쓸한 사람’이라고 답했었다. 어딘가 빈 곳이 있는 사람이 좋았다. 그 빈 곳에 고여 있는 외로움에 끌렸다. 동아리를 하며 천천히 좋아하게 됐던 A는 자그마하고 비쩍 말랐었는데 웃으면 그늘이 졌다. 약간 굽고 마른 등을 보면 맛있는 걸 사 주고 싶었다. 환히 웃게 해주고 싶었다.
2학년 때 잠깐 만났던 B는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었고, C는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로 정신과 상담을 다녔다. 아픔은 죄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의 그 점을 싫어했다. 가장 좋아했던 D는 긴 목에 깊은 눈이 슬펐다.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서 뒷모습을 바라보면, 주황빛 가로등 불빛 아래 그 사람의 어깨는 끝 간 데 없이 처져 있었다. 당장 다시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어질 만큼.
좋아하고 보니 어딘가 조금씩 모자란 사람들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비어 있었기에 내 마음이 머물렀다. 하지만 텅 빈 마음을 내가 채워줄 수 있는 건 아니어서, 그 사람들을 만날수록 나도 함께 비어 갔다. 그들을 사랑하면서 행복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그늘진 사람들에게 끌렸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뜯어말렸다. 이제는 좀 햇살 같은 사람을 만나, 따뜻하고 너를 더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 네가 자식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모성애를 자극하는 사람은 그만 좀 만나, 같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가까운 한 언니는 이런 나의 상태에 병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구원 자병’. 내가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 만큼 강하거나, 따뜻하거나,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믿음이 원인이라는 거였다. 언니는 내게 “사람은 결국 혼자야. 누구도 누군가를 감히 구원할 수 없어, 그건 오만이야.”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내가 딱하다는 눈빛으로 두 볼을 감싸안으면, A는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야. 날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지 마.” 하고 서늘하게 말했었다.
그때의 나는 어설픈 동정심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사랑이라 믿었던 것 같다. 휘청거리는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애정을 쏟아부음으로써 붙잡고 싶었다.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싶다, 원하는 것을 하게 해주고 싶다… 같은 생각에 빠져 내가 한 존재를 보다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그 사람이 잠겨 있는 어둠에서 그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누군가를 구원하는 척 실은 나 자신이 구원 받고 싶었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알게 됐다.
텅 빈 자취방에 혼자 앉아 있으면 몸서리치게 외로웠던 그때, 그래서 차라리 귀신 같은 거라도 나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때로부터 나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고민들을 거쳐 이제 조금은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이제 나는 존재가 다른 존재를 구원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텅 빈 마음으로 비슷하게 텅 빈 사람을 아무리 끌어안아 보았자, 그건 소설가 이응준이 썼듯 “골초의 흡연처럼 진정한 위로가 아니”고, “얼음들이 모이면 얼음 창고가 되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사람은 비슷한 부분에 이끌린다. 유난히 마음에 쓸쓸한 바람이 부는 사람, 뒷모습이 슬픈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이끌리는 건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결국 그들과 함께 있는 내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헤쳐 나올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의 빈 곳을 메우려는 노력일 것이다. 내게 ‘구원자병’이라는 적확한 단어로 나를 도왔던 그 언니처럼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구원은 셀프다.
2학년 때 잠깐 만났던 B는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었고, C는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로 정신과 상담을 다녔다. 아픔은 죄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의 그 점을 싫어했다. 가장 좋아했던 D는 긴 목에 깊은 눈이 슬펐다.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서 뒷모습을 바라보면, 주황빛 가로등 불빛 아래 그 사람의 어깨는 끝 간 데 없이 처져 있었다. 당장 다시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어질 만큼.
좋아하고 보니 어딘가 조금씩 모자란 사람들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비어 있었기에 내 마음이 머물렀다. 하지만 텅 빈 마음을 내가 채워줄 수 있는 건 아니어서, 그 사람들을 만날수록 나도 함께 비어 갔다. 그들을 사랑하면서 행복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그늘진 사람들에게 끌렸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뜯어말렸다. 이제는 좀 햇살 같은 사람을 만나, 따뜻하고 너를 더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 네가 자식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모성애를 자극하는 사람은 그만 좀 만나, 같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가까운 한 언니는 이런 나의 상태에 병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구원 자병’. 내가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 만큼 강하거나, 따뜻하거나,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믿음이 원인이라는 거였다. 언니는 내게 “사람은 결국 혼자야. 누구도 누군가를 감히 구원할 수 없어, 그건 오만이야.”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내가 딱하다는 눈빛으로 두 볼을 감싸안으면, A는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야. 날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지 마.” 하고 서늘하게 말했었다.
그때의 나는 어설픈 동정심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사랑이라 믿었던 것 같다. 휘청거리는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애정을 쏟아부음으로써 붙잡고 싶었다.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싶다, 원하는 것을 하게 해주고 싶다… 같은 생각에 빠져 내가 한 존재를 보다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그 사람이 잠겨 있는 어둠에서 그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누군가를 구원하는 척 실은 나 자신이 구원 받고 싶었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알게 됐다.
텅 빈 자취방에 혼자 앉아 있으면 몸서리치게 외로웠던 그때, 그래서 차라리 귀신 같은 거라도 나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때로부터 나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고민들을 거쳐 이제 조금은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이제 나는 존재가 다른 존재를 구원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텅 빈 마음으로 비슷하게 텅 빈 사람을 아무리 끌어안아 보았자, 그건 소설가 이응준이 썼듯 “골초의 흡연처럼 진정한 위로가 아니”고, “얼음들이 모이면 얼음 창고가 되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사람은 비슷한 부분에 이끌린다. 유난히 마음에 쓸쓸한 바람이 부는 사람, 뒷모습이 슬픈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이끌리는 건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결국 그들과 함께 있는 내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헤쳐 나올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의 빈 곳을 메우려는 노력일 것이다. 내게 ‘구원자병’이라는 적확한 단어로 나를 도왔던 그 언니처럼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구원은 셀프다.
Writer 도상희 1dosh@naver.com 제 글의 반은 짝사랑에, 반은 외로움에 빚을 졌습니다.
#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