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봉준호 정주행] #3. 봉스트라다무스의 2017년 예언
그의 영화는 2017년에도 유효하다.
봉준호는 오래된 사회 문제를 다루지만, 그의 영화는 2017년에도 유효하다. 예언처럼 딱 들어맞는 부분까지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가 여전하다는 뜻이다.

2003 살인의 추억
예언① : 살인을 추억하는 사람이 범인이다
<살인의 추억>은 시대를 박제한 영화다. 봉준호 감독은 80년대의 공기를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농협 마크가 새겨진 수첩처럼 사소한 것들까지 챙기면서. '봉테일'의 시작도 여기부터다. 그가 그토록 집요하게 재현하려 했던 공기는 뭐였을까?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수사 실패가 만든 참사다. 그 시절 경찰 수사는 자백 중심이었다. 군이 간첩이나 전쟁 포로를 대하듯 용의자를 대했다. 증거가 부족해도 자백만 있으면 그만. 용의자를 두들겨 패고 거짓 자백을 강요하는 게 수사의 전부였던 시절이다. 형사들은 그 시대를 움직이는 조력자였다. <살인의 추억>은 폭압과 무기력이 들숨과 날숨으로 작동하는 80년대의 공기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영화가 개봉된지 14년이 지난 2017년 4월, 전두환이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는 1996년 12월에 있었던 12.12 및 5.18 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원심은 사형. 형량이 낮춰진 것이다. 5.18유족들은 “이게 무슨 재판이야. 수천 명을 죽인 사람에 무기가 말이 되느냐”며 분노했다.
결국 전두환은 2년 만에 석방. 마침내 이렇게 자서전까지 낸다. 그는 170여 페이지에 걸쳐 5.18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오래전 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추억을 더듬는 사람처럼.
아, 느낌이 온다. 봉준호는 14년 전에『전두환 회고록』 출간을 예상한 게 분명하다! <살인의 추억>은 사건의 잔혹함과 범인의 악랄함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군부의 시대를 자세히 묘사한다. 의도가 뭐겠는가? 영화는 시대를 떠올리게 하고, 시대는 우리에게 단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여전히 죗값을 치르지 않은 그때 그 사람. 이쯤 되면 빼도 박도 못 하는 거 아닌가.

2006 괴물
예언② : 한국이 어떤 곳인지 국민들은 모른다
<괴물>은 서울 한복판을 관통하는 한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강은 버스·지하철을 타고 지나치는 일상적인 공간이다. 다른 영화에서도 한강은 부지런한 주인공의 조깅 장소, 연인의 데이트 장소 정도로만 쓰였다.
봉준호 감독은 잠실 근처에서 자랐다. 개발되기 전부터 한강을 쭉 지켜 봐왔던 그는 ‘우리가 몰랐던 한강’을 그려내고 싶었다. 평화롭던 오후, 괴물이 나타난 순간 한강은 그동안 드러낸 적 없던 기괴한 표정을 짓는다.
괴물에게 잡혀간 현서를 찾는 동안, 가족들은 ‘그때까지 몰랐던 한국’의 면면을 보게 된다. 언론은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가족들에게 노골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정부 관계자(김뢰하)는 재난의 원인, 해결 대책 등 자세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고 국민을 통제하는 데 급급하다.
현서가 살아 있을 거라는 가족들의 희망은 ‘제정신 아닌 사람의 말’ 취급을 받는다. 할아버지(변희봉)와 삼촌(박해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방법들을 찾지만 돈에 눈 먼 이들에게 번번이 뒤통수를 맞는다. 아버지(송강호)는 딸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병원을 탈출한다. 온갖 ‘노오력’을 총동원해서 겨우 괴물을 불태우고 현서를 구한다. 교복 차림의 현서는 그러나 이미 싸늘하게 죽어있다.

영화가 만들어진 지 10년. 그동안 현실에서도 끔찍한 재난이 수차례 일어났다. 우리가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실감케 하는 순간들이었다. 영화를 볼 땐 웃을 수 있었지만 재난 이후 벌어진,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일을 보면서는 웃을 수 없었다.
특히 2014년 4월 이후, ‘헬조선’을 떠나고 싶다는 목소리가 부쩍 늘었다. 우리가 몰랐던 한국은 ‘헬’이었고, 괴물 같은 재난이 연이어 덮친 후에야 그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됐다. 봉준호는 어쩌면 <괴물>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헬조선’을 드러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2009 마더
예언③ : 우리 유라가 안 그랬어요
<마더>는 2시간에 걸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모성은 정의나 진실 위에 존재할 수 있을까? 혜자는 살인죄로 구치소에 있는 아들을 위해 직접 증거를 모은다. 아들이 저지른 살인임을 알고 난 뒤엔 목격자를 죽이고 불까지 지른다.
피해자 장례식에서 “우리 아들이 안 그랬어요” 할 땐 광인의 눈빛. 혜자에게서 우리는 자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던 엄마들을 떠올린다. 결국 자식 사랑하는 부모 마음. 영화가 불편한 건 혜자의 끔찍한 행동들이 평범한 모성에서 출발했기 때문이 아닐까.

2017년 6월, 우리는 매일 <마더>를 본다. 혜자 역에 최순실, 도준 역에 정유라. 소름! 최순실은 딸의 입학을 위해 한 대학을 통째로 망가트리고, 딸이 탈 말을 구하기 위해 수백억의 세금을 증발시켰다. 딸은 “다 엄마가 했다” 고 한다. 삼성으로부터 받은 특혜도 몰랐고, 대학에 가고 싶었던 적도 없었단다.
“누가 물어보면 엄마가 했다고 그래. 너는 모른다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속삭이는 최순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자식을 끔찍이 아낀 엄마의 모성이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너무 소름돋게 정확한 거 아닌가? 봉준호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예상했던 게 확실하다. 최순실은 자식을 위한 일이면 뭐든 했다. 혜자가 그랬던 것처럼!
모성에는 이기심을 용인하는 사회. 누구나 돈과 권력만 있으면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고, 놀고먹어도 잘살게 해주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2009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국정농단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도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사건부터였다. 아주 척척 들어맞는다. 최순실은 아마 법정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딸이 안 그랬어요.”

2013 설국열차
예언④ : 길을 잘못 든 기차는 멈춰야 한다
<설국열차>의 배경은 끝없이 달리는 기차 안이다. 기차 속 계급 관계는 명확하다. 머리 칸은 명령하고, 꼬리 칸은 명령에 따른다. 기차 안 사람들은 이 구조에 익숙하다. 그러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 기회를 엿보던 그는 머리 칸에 가는 방법을 아는 남궁민수(송강호)와 함께 엔진을 차지하기 위한 반란을 시도한다.
방법은 단순하다. 문을 열고, 앞으로 갈 뿐이다. 두 사람이 머리 칸에 가려는 이유는 달랐지만, 어쨌든 목적지는 같았다. 일단 머리 칸으로 가는 것이 중요했다.

대통령제를 택한 한국의 정치는 명확했다. 한 사람을 골라 머리 칸을 맡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꼬리 칸에 머물렀다. 그것이 민주주의라 생각했다. 이번엔 따르는 것에 익숙하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거리로 나왔다.
방법은 단순했다.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걸을 뿐이었다. 사람들마다 광화문에 나오는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어쨌든 당장의 목적지는 같았다. 일단 머리 칸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한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중요했다.
촛불집회는 대통령이 쫓겨나면서 끝났다. 처음 모일 때만 해도 탄핵까지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언론의 표현대로 ‘사상 초유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설국열차』는 기차가 멈추면서 끝난다. 커티스는 기차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윌포드 대신 길리엄(존 허트)을 머리 칸에 앉히면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반면 남궁민수는 애초부터 기차를 멈추기 위해 크로놀을 모았다. 결국 딸 요나(고아성)가 노예처럼 일하던 아이와 함께 기차 밖으로 나온다.
눈과 북극곰밖에 없는 곳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없다. 새 대통령이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지도 알 수 없다. 5년 앞선 봉준호의 결론은 단순하다. “길을 잘못 든 기차는 멈춰야 한다.”
[821호 - issue]
Editor 기명균 김준용 dragon@uni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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