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매일 다른 저녁이 찾아오는 곳, 보라카이

저녁마다 해변을 채우는 것
5월의 보라카이는 몹시 뜨거웠다. 이맘때 가면 폭염에 거지꼴을 면치 못할 거라고 말해준 이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천진난만하게 짐을 쌌다 (여러분, 여행지를 정할 땐 꼭 기온을 검색해봅시다).  

밤 비행기를 타고 칼리보 공항에 도착해 문을 나서자, 열대의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습하면서도, 무르익은 과일의 달큰한 냄새가 떠도는 듯한 공기. 버스를 기다리며 길 건너 슈퍼에서 냉큼 맥주를 사 마셨다. 그때만 해도 내일이면 더 신나겠지, 싶었는데….  

이튿날부터 예상치 못한 폭염과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화이트 비치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한낮엔 도무지 그늘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낮엔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해먹에 걸려 있다가 해가 수그러든 늦은 오후부터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해변을 산책하고, 스노클링을 하며 바닷속을 들여다보다가, 저물녘이면 맥주를 마시며 오늘의 노을을 기다렸다. 내 피로와 상관없이 매일의 노을만큼은 정말 아름다웠다.  

언젠가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전 일기를 들추다보면, 마치 적어놓은 일들만 일어난 것 같다고. 그 외에도 숱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딘가로 다 사라져버리고 적힌 일들만 삶에 존재했던 것 같다고.  

하루에서 오려낸 순간을, 스치는 마음을 애써 적어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게 과연 내가 보낸 시간의 증언이 되어주기나 할까? 물어보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순간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려고, 쓴다. 폭염과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그 나흘 동안 이토록 빛나는 장면들이 있었다. 어쩌면 여행은 그런 순간에 대한 선택적 기록인지도.



   
노을을 저어가는 사람들 

보라카이에서 머문 숙소는 화이트 비치 바로 앞에 있었다. 쪼리를 끌고 털레털레 몇 걸음 나서면, 어느 때고 이런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다(그렇지만 더워서 나갈 수가 없…). 화이트 비치 쪽의 숙소들이 다 그렇듯, 바다쪽엔 작은 바(Bar)를 열어 두었는데 저녁이면 늘 거기 나무 의자에 앉아 이런 풍경을 보곤 했다. 낮 동안 더위에 지친 개처럼 헥헥대다가도, 그 시간만 되면 ‘아, 내가 이 풍경을 보려고 여기 왔지’ 싶어졌다. 어디서든 노을의 마법이란 게 있나 보다.  
  
저녁마다 해변을 채우던 것은 

해 질 무렵의 화이트 비치는 낮보다 더 붐볐다. 다들 어디 있다가 나타나는지 그 시간만 되면 보라카이에 머무는 모두가 노을 지는 바다를 향해 모여드는 것 같았다. 시시각각 바뀌는 구름과 물감처럼 퍼져나가는 노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붉은 바다를 노 저어 가거나 썰물을 따라 바다 저 끝까지 걸어 나가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 되어주었다. 돌아가면 다른 무엇보다 이 저녁의 풍경들을 기억하게 되겠지, 그렇게 예감하며 마시는 맥주는 미지근하면서도 달착지근했다.  
  
하염없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창가 

누군가 보라카이에 간다면, ‘리얼 커피’ 2층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보라고 하고 싶다. 에어컨 시원한 스타벅스에 비하자면, 천장에 매달린 꼬질꼬질한 팬이 느릿느릿 돌아가는 곳이지만 그래서 더 좋은 곳.  

2층 창가의 길다란 바에 앉아 밖을 내다 보면, 스무 개도 넘는 밀짚모자를 제머리에 층층이 쌓아 쓰고 호객하는 모자장수들, 방금 바다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물개 같은 다이버들, 페트병 뚜껑으로 장기 같은 걸 두고 있는 동네 사람들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야자수 사이로 저 멀리까지 내다보이는 눈부신 바다는 물론이고. 이토록 열대스러운 풍경을 질리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창가가 그곳에 있다.  
 


Editor 김신지 summer@univ.me 열대의 해변에서 마시는 모닝 맥주를 사랑합니다. 
#여행#보라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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