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박열>의 주인공은 박열이 아니다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후미코의 일생을 살펴봤다.

박열
감독 | 이준익 출연 | 이제훈, 최희서, 김인우
“당신 혹시 배우자가 있으신가요?” 박열(이제훈)의 시「개새끼」를 읽고 깊이 감명 받은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그를 만나자마자 돌직구를 날린다. 결국 그들은 한집에 사는 연인이자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사’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지가 된다. 한편, 불령사 단원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을 덮기 위해 박열과 후미코에게 ‘대역죄’를 덮어씌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목숨이 걸린 재판정에 서게 되는데….
박열은 일제강점기의 다른 활동가에 비해 주목 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폭탄으로 황태자를 없애겠다는 그의 계획은 막연했고, 실행에 옮기지도 못했다. 영화 <박열>의 방점이 특정 사건이 아니라 늘 당당한 박열의 ‘태도’에 찍히는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태도로 치자면 가네코 후미코야말로 진짜 주인공 아닐까. 일본인임에도 더 적극적으로 일제에 맞섰고, 마지막 순간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후미코의 일생을 살펴봤다.
불행을 견디게 한 슬픈 굳은살, 가족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았기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후미코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했다. 아버지 ‘분이치’는 산골 농사꾼 집안에서 자란 아내 ‘기쿠노’가 자기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이 살면서도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당연히 후미코 역시 호적이 없었고, 학교에서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출석 체크할 때 선생님은 후미코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한 학년을 마친 뒤 지급 받는 증서도 다른 아이들의 것처럼 빳빳한 종이가 아닌 싸구려 종이를 대충 접어 만든 것이었다.
서류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재 자체를 무시당했던 기억은 후미코로 하여금 법률·제도를 불신하게 했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무적자라는 이유로 그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게 법률입니다.” 어린 후미코는 가정에서도 보호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권위를 내세우며 가족들을 정신적·육체적으로 학대했고, 어머니는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남편에게서 벗어나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모든 권위로부터 벗어나 자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일평생을 살아온 후미코에게 가족은 반면교사였던 셈이다.
그는 부모-자식 역시 강자와 약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부모가 일방적으로 자식의 생활방식을 결정하고 자식은 그에 따르는 것은 ‘효’ 로 미화된 강자의 지배·억압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순탄치 않았던 유년기를 거친 후미코로서는 평생 억압 받는 편에 서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았기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후미코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했다. 아버지 ‘분이치’는 산골 농사꾼 집안에서 자란 아내 ‘기쿠노’가 자기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이 살면서도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당연히 후미코 역시 호적이 없었고, 학교에서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출석 체크할 때 선생님은 후미코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한 학년을 마친 뒤 지급 받는 증서도 다른 아이들의 것처럼 빳빳한 종이가 아닌 싸구려 종이를 대충 접어 만든 것이었다.
서류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재 자체를 무시당했던 기억은 후미코로 하여금 법률·제도를 불신하게 했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무적자라는 이유로 그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게 법률입니다.” 어린 후미코는 가정에서도 보호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권위를 내세우며 가족들을 정신적·육체적으로 학대했고, 어머니는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남편에게서 벗어나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모든 권위로부터 벗어나 자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일평생을 살아온 후미코에게 가족은 반면교사였던 셈이다.
그는 부모-자식 역시 강자와 약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부모가 일방적으로 자식의 생활방식을 결정하고 자식은 그에 따르는 것은 ‘효’ 로 미화된 강자의 지배·억압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순탄치 않았던 유년기를 거친 후미코로서는 평생 억압 받는 편에 서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일본을 사랑할 수 없었던 일본인 후미코


“나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한다.” 무적자 신분 때문에 나라로부터 버림받다시피 했지만 어쨌든 후미코는 일본인이다. 조선인들과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재판정에 조선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들어가는 모습은 많은 일본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서 조선인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때니까.
아버지 ‘분이치’가 후미코와 박열의 동거 사실을 듣고 나서 “비루한 조선인과 동거하는 것은 가문을 더럽히는 짓이다. 오늘 이후로는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럼에도 후미코는 박열을 비롯한 ‘불령선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을 그토록 증오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조선에서 살았던 7년간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친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충북 청주의 한 마을로 떠나온 후미코는 학대당하는 조선인들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특히 1919년의 만세운동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고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 고 회고했다.
후미코에겐 비참한 조선인들의 상황이 남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후미코 역시 마찬가지로 억압 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적자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그러한 경험은 조선인에 대한 연대 의식으로 이어졌 고, 훗날 무정부주의자로서 살아가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나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한다.” 무적자 신분 때문에 나라로부터 버림받다시피 했지만 어쨌든 후미코는 일본인이다. 조선인들과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재판정에 조선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들어가는 모습은 많은 일본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서 조선인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때니까.
아버지 ‘분이치’가 후미코와 박열의 동거 사실을 듣고 나서 “비루한 조선인과 동거하는 것은 가문을 더럽히는 짓이다. 오늘 이후로는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럼에도 후미코는 박열을 비롯한 ‘불령선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을 그토록 증오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조선에서 살았던 7년간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친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충북 청주의 한 마을로 떠나온 후미코는 학대당하는 조선인들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특히 1919년의 만세운동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고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 고 회고했다.
후미코에겐 비참한 조선인들의 상황이 남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후미코 역시 마찬가지로 억압 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적자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그러한 경험은 조선인에 대한 연대 의식으로 이어졌 고, 훗날 무정부주의자로서 살아가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잊지 않은 '나' 라는 기준


“처음부터 끝까지 나 자신을 위해 자신을 표준으로 삼습니다.” 자기를 위해 싸운 것이기 때문에 감옥에 잡혀 들어가면서도 후미코는 당당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 사실을 덮기 위해 폭탄입수계획을 꼬투리 잡아 박열과 후미코를 대역죄인으로 몰아갔다.
후미코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예 재판정을 무대로 삼아 본인의 사상을 널리 선보이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감옥에서 자서전 집필에 몰두했던 것도 그래서다. 휴식도 운동도 하지 않고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후미코는 안구 피로 및 결막염 때문에 치료를 받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쓰고 또 썼다.
죽고 난 후에 라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남긴 기록은 이후 불령사 동지 구리하라 가즈오에게 전달되어 책으로 출판되었다. 사형 판결이 선고된 순간, 후미코는 웃으며 일어나 두 팔을 들고 “만세!”를 외쳤다. 형무소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겠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말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인 박열과 달리 감형 통보가 적힌 종이를 받자마자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감형을 받은 지 3개월 반 만에 후미코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감옥 속에서 본인의 신념과 사상이 흔들리느니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것 아닐까. 국가권력의 타살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지만 후미코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 선택이 이해가 된다. 후미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겁내는 건 따로 있었다. ‘결정권을 잃고 내가 아닌 채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 자신을 위해 자신을 표준으로 삼습니다.” 자기를 위해 싸운 것이기 때문에 감옥에 잡혀 들어가면서도 후미코는 당당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 사실을 덮기 위해 폭탄입수계획을 꼬투리 잡아 박열과 후미코를 대역죄인으로 몰아갔다.
후미코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예 재판정을 무대로 삼아 본인의 사상을 널리 선보이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감옥에서 자서전 집필에 몰두했던 것도 그래서다. 휴식도 운동도 하지 않고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후미코는 안구 피로 및 결막염 때문에 치료를 받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쓰고 또 썼다.
죽고 난 후에 라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남긴 기록은 이후 불령사 동지 구리하라 가즈오에게 전달되어 책으로 출판되었다. 사형 판결이 선고된 순간, 후미코는 웃으며 일어나 두 팔을 들고 “만세!”를 외쳤다. 형무소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겠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말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인 박열과 달리 감형 통보가 적힌 종이를 받자마자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감형을 받은 지 3개월 반 만에 후미코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감옥 속에서 본인의 신념과 사상이 흔들리느니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것 아닐까. 국가권력의 타살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지만 후미코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 선택이 이해가 된다. 후미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겁내는 건 따로 있었다. ‘결정권을 잃고 내가 아닌 채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영화#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