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여OO는오늘도] 배우 & 감독, 문소리

꽃이 아니라 뿌리이고 싶다
배우 문소리는 ‘진심을 전하기 위해 온갖 가짜를 동원하는 것’이 연기라고 생각한다. 감독 문소리의 첫 연출작 <여배우는 오늘도> 역시 그렇다. 픽션이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여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그가 느낀 것들을 담아낸 ‘진짜 이야기’다. 그에게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곧 배우로서의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한 명의 여성으로서,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그가 품고 있는 생각들이 더 궁금해졌다.     

 
‘여배우’에 대한 영화를 처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셨을 때는 언제인가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특별히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꽤 힘들었는데, 그때 스스로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영화 공부를 결심했고, 임순례 감독의 조언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죠. 졸업까지 3개의 단편을 만들어야 했는데, 자연스럽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택했어요. 연출로서의 욕망이나 계획보다는 ‘배우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한 셈이에요. 직업적인 측면에서의 여배우를 넘어 여자의 삶, 그 속살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처음 연기를 배울 때, 제작진이나 선배들로부터 ‘여배우는 이러이러해야 돼’라는 말을 적지 않게 들으셨을 것 같아요.
<박하사탕> 때 이창동 감독님께 혹독하게 교육 받았는데요, 핵심은 ‘여배우는 이러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가르침이었어요. 배우라는 직업은 주변에서 이렇다 저렇다 말을 많이 하니까 그런 말이 곧 나인 것처럼 오해하기 쉽고, 휘둘리다 보면 자기를 잃어버리기 쉬운 일이니까 자신의 베이스를 지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여배우를 보는 대중의 시선도 남자 배우를 볼 때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해야 될 것도 많고, 하지 말아야 될 것도 많고.
예전에 어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시상자가 “여배우는 영화의 꽃이라 할 수 있죠. 아름다운 꽃에게 드리는 상입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저는 영화의 꽃이기보다 뿌리이고 줄기이고 싶습니다. 차라리 거름이 되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수상 소감을 말했어요. 영화를 계속 열심히 하고 싶다는 뜻도 있지만, 왜 여배우를 꽃으로만 표현하느냐, 반발심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여전히 그런 편견을 만나면 아쉬워요. 여배우도 영화 안에서 다양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다양하게 쓰였으면 해요.

영화에서 연두가 TV에 나온 엄마를 보고 좋아하자 “엄마 아냐”라면서 TV를 꺼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배우와 생활인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게 힘들지는 않으세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하지만, 사실 영화 일 하는 친구들 중에서는 제가 제일 평범하게 살아요. 결혼하고 애도 낳고, 남과 다를 게 없어요. 내 안에 섞여 있는 각각의 두 사람이 예전엔 다투기도 했지만, 지금은 사이좋게 손잡고 가죠. 균형을 유지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고, 아직 터득했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공부가 중요해요. 배우는 더더욱 그렇고요.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렇듯 뛰어난 여배우도 역할이 없어서 연기를 쉬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현상이 과거에 비해 더욱 심해진 건가요?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한국 영화가 산업적으로 크게 발전하고, 흥행이 될 만한 영화에 투자·기획이 쏠리면서 시작된 현상이라고 봐요. 최근 몇 년간 영화의 스토리나 캐릭터가 장르적으로 획일화된 측면이 있죠. 그렇게 점점 더 남성 중심적인 액션·스릴러가 남성 감독들에 의해 생산되었어요. 70~80년대에는 확실히 여성 중심의 영화가 많았고, 내가 데뷔하던 2000년 초중반까지도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거든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처럼 여성 중심의 영화가 있었고, <가족의 탄생> 같은 중급 규모의 영화도 꽤 나왔고요. 그래서 ‘충무로 여배우 기근 현상’이라는 말은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여배우가 없는 게 아니라, 여배우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역할 자체가 드물어요.

최근 한국 영화들이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어요.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한국 영화에 대해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 대중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담론을 형성하는 것 자체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대중의 기호를 파악해서 시나리오에 반영하는 많은 기획영화처럼, 근래의 분위기를 보면 앞으로의 영화에 이런 담론이 반영되겠구나 하는 기대가 생겨요. 대중이 한국 영화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과정인 것 같아요.

감독으로서, 배우로서 여자 스태프들이 현장에서 겪는 일을 많이 보기도 하셨을 것 같아요.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 사회예요. 비단 영화계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다양성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요. 현장의 스태프도 여성과 남성이 직군별로 구분되거든요. 분장·의상·미술·홍보 마케팅은 여성이 다수인 반면, 촬영·조명·녹음 등 기술 스태프들은 남성이 압도적이에요. 감독을 비롯해 현장 스태프의 다수가 남성이다 보니 아무래도 의사 결정이 남성 중심으로 진행되죠. 요즘 여성 프로듀서가 많아지면서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남성 영화인들이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도 하고요. 여성영화인모임, 민우회, 영진위 등이 함께 여성 영화인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을 청할 만한 창구를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도도 중요하지만 사소한 것부터 바뀌어야 돼요. 가령, 감독 커피는 여자 연출부가 챙겨야 한다거나, 여자 스태프는 노출을 삼가야 한다는 등의 비합리적인 부분들을 없애나가야죠. 영화계의 성평등을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지 자주 고민하는데, 이 부당함에 계속 분노하기만 해서는 해결이 어려울 것 같아요. 스스로 불행해지면 문제를 개선할 힘이 없어지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여성 영화인, 특히 여성 감독의 수가 늘어나길 바라고 있어요.

과거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가 자꾸 남자들만 세상을 구하고 역사의 중심에서 활약을 펼치는 기획영화의 판으로만 돌아간다면, 할 수 없이 여자들을 데리고 영화를 찍어야겠지”라고도 말씀하셨는데, 요즘이 그런 상황 아닐까요?
한때 영화감독이랑은 죽어도 결혼 안 한다고 했는데 영화감독이랑 결혼했어요. 사람 일이라는 게 장담을 못 하는 거고, 이런 말을 함부로 쉽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깨달았죠. 그래서 다음 영화 연출에 대해 단언하기는 어려워요. 일단 저에게 1순위는 늘 연기거든요. 감독이 되겠다는 목표 같은 것도 없어요. 다만 지금까지 10여 년간 영화 일을 하면서 생긴 친구들과 영화를 통해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하고 싶어요. 우선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겠지만.

[828호 - Issue]

사진 제공 필앤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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