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명절날 엄마를 보는 딸들의 속마음

명절날 '며느리'인 엄마를 보며 딸들이 느끼는 것들

시월드니 명절증후군이니 하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왔지만, 우리 세대의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상도 많이 변했고, 남자와 여자는 똑같다고 배우며 자라왔다. 그냥 놀기만하면 됐던 어린 날의 명절엔, 정말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크면서 엄마가 보였다. 부엌에서 쉴 새 없이 일하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를 외면할 수 없어서 놀던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엄마, 줘. 이건 내가 할게." 점점 엄마와 함께 부엌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할머니 댁에서 내 자리는 엄마의 옆자리가 되었다.   언젠가부턴 어른들도 나에게 이런 저런 주문을 한다. 여긴 내 집도 아닌데 컵이나 접시를 갖다달라고 하신다. 심지어 같이 놀던 친척 오빠 조차도. 명절의 공기가 달라졌다.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손녀는 며느리의 딸이 된 것 같다. '며느리의 딸'이라는 말에 공감한 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빠도 나도 같은 자식인데


“누나도 와서 먹어” 끊임없이 반찬을 나르며 식사 준비를 하는 내게 사촌 동생이 그만하고 누나도 와서 먹으란다. 지금 먹고 있는 상은 누가 차렸게? 다들 숟가락을 놓을 즈음 엄마와 나는 숟가락을 든다. 그것도 잠시. 밥을 다 먹고 입가심이 필요해진 고모부가 커피를 찾는다. 이럴 때 주전자에 물을 올리는 건 항상 나다.

공동묘지를 오르내리던 중, 막내 오빠가 첫째 오빠를 향해 앓는 소리를 한다. "형이 빨리 아들을 낳아야 내가 무거운 걸 안 들지." 정종이 많이도 무거운가 보다. 오빤 아침에 엄마와 내가 성묘 음식 할 때는 내내 자다가, 20분 동안 정종 한 병을 나르고 있는 중이다. 엄마랑 내가 들고 있는 음식 바구니는 안 보이나 봐.   나가 산다는 이유로 명절 당일에만 얼굴을 비추는 그는, 준비를 돕기는커녕 고생한단 이야기를 한 적 조차 없다. 하지만 지난 추석에 왜 이번엔 갈비찜이 없냐는 그의 투정에, 이듬해 설 음식을 준비할 때 갈비를 가장 먼저 사기도 했다.

내가 아들이었으면 달랐을까. 나조차도 엄마를 ‘돕는’ 입장이 된 후에야 불편한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 혼자 고생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시간이 흘러도 당사자가 될 일 없는 남자 형제들에게, 명절은 정종 한 병의 무게에 그치겠지.  

원경

 

아빠 미안, 난 적어도 아빠보단 나은 사람이랑 결혼할거야

내가 명절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건 아빠 때문이었다. 명절날 내 자리가 자연스레 엄마 옆자리로 변한 직후였다. 엄마를 도와 전을 부치는 기름내가 고소하다 못해 역해질 때쯤 고개를 들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아빠가 눈에 들어왔다. 아빤 지겨운 듯 하품을 했고, 어느샌가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잘 보이는 위치였다. 그래서 엄마가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금 혼란스러웠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아빠는 분명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어린 사촌 동생들과도 잘 놀아줬고, 할머니가 잔뜩 싸준 명절 음식들은 무겁다며 항상 아빠 혼자 들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빠는 밥을 다 먹으면 상 뒤로 멀찍이 물러나 앉아있었고, 부엌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으며, 명절 내내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되었다. 구시대의 관습, 그 자체였다.


사실 아빠가 변한 건 아니다.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머리가 굵어지니 아빠의 그 모습들이 불편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인제 와서 “명절에는 엄마를 좀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아빠를 쏘아붙일 수 없다. 그런 잔소리로 변하지 않을 거란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리 아빠’가 다정하고 섬세한 줄 알았던 어릴 적, 많은 딸은 ‘아빠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었을 것이다. 커버린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적어도 아빠 보다 나은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민영


엄마는 아득바득 면허를 땄다

우리 엄마는 신씨 집안의 며느리로서 아주 거침이 없다. 제사 음식을 척척 해놓고는 여자들끼리 설맞이 백화점 쇼핑을 간다. 누군가 배고프다 하면 배달 음식을 시켜준다. 그게 큰아버지이더라도 별 예외는 없다. 제사가 끝나면 칼같이 정리한다. 집에 가져갈 음식을 야무지게 챙겨서 곧장 떠난다. 누가 들으면 지옥의 시월드 없는 좋은 곳에 시집갔다 싶겠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롯이 엄마 혼자만의 기나긴 투쟁이 존재했다.

아빠는 명절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꼭두새벽부터 친가의 시골에 내려갔다 시간은 기본인 귀성길부터가 엄마의 고되고고된 명절 맞이의 시작이었다제각각 도착하는 신씨 집안 다섯 남매 가족의 밥상을 일일이 차리고 치우기만 해도 하루가 끝나버렸다고 한다거기에 혼자 계시는 친할머니의 밀린 빨래며 청소며 온갖 집안일을  해내고도 칭찬은커녕 구박받기 일쑤였다고 한다그렇게 시달리다 명절 마지막 날의 해가  무렵이 되면 그제야 효심 깊은 아빠는 슬슬 집에  채비를 했다고 한다.

외가댁에 가자는 말에도 못 들은 척, 시어머니 등쌀에 도움을 청해도 아빠는 꿈쩍하지 않았다. 포기한 엄마는 혼자만의 생존법을 터득해갔다. 엄마가 운전을 배워야겠다 마음먹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빠의 탐탁지 않은 시선에도 아득바득 면허를 딴 엄마는 혼자서라도 운전을 해 외가댁에 다녀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씩 또 조금씩 쟁취해가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변한 것은 엄마일 뿐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십 년 전 차려준 밥을 다 먹고 커피를 타 달라 하시던 분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빠가 손 하나 까딱 않으려는 모습이 괜히 얄미워, ‘셀프’를 권했으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아빠도 나도 미묘하게 기분이 상해가고 있을 때쯤, 눈치 빠른 언니가 재빨리 “커피 드실 분?”을 외쳤다.  

한솔

 

난 여전히 아빠의 딸이고, 할머니의 손녀다

 
“딸이 크니까 좋네. 시댁에서 힘든 얘기, 아빠 뒷담화도 할 수 있고.” 언젠가 명절날 엄마가 했던 말이다. 엄마가 안쓰럽기도 했고, 공감해줄 수 있는 딸이 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엄마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불편해진 게 더 많긴 하다. 일단 명절날 몸이 고단해졌고, 무엇보다 할머니나 아빠에게 어쩔 수 없이 미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도 내 이런 마음을 아는 걸까. 나한테 이런저런 성토를 하다가 갑자기 멈추곤 한다. “그래도 할머니가 너 많이 챙겨주셨는데…”하며.

하긴, 할아버지는 ‘바깥양반’이고 할머니는 ‘안사람’이던 시절이 꽤 길었다. 모두들 그 긴 시절을 살아 지금에 와 계신다. 70년이 넘는 인생의 관성에 대해, 이제 고작 20년 좀 넘게 산 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리고 어차피 한 두 세대를 거치며 변할 관습이다. 오랜만에 모인 자리에서 괜히 나만 신세대인 척, 남자들을 부엌으로 보내 불편한 분위기를 만드는 건 귀찮고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적당히 맞춰드리고 하하호호 하는 게 나을지도.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는 당장 이번 설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번 설에도 다음 설에도, 난 더 이상 할머니와 아빠에게 미운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다. 어른들도 누군가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건 유쾌하지 않을 거다. 요즘은 안 만나는 집도 많다는데, 우린 온 가족이 어렵게 모인 거 아닌가.

큰아버지께 식혜 떠다드리라는 할머니의 말이 불편하다. 큰아버지 아들(사촌오빠)도 옆에 있는데, 왜 내가? 난 할머니의 명령 때문이 아닌 내 호의로 큰아버지에게 식혜를 떠 드리고 싶다. 내가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가식으로 하하호호하고 있는 자리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친가의 '큰 손녀'이자 '큰며느리의 딸'인 나는, 오늘도 모두가 모여 앉은 밥상머리에서 굳이 말해본다. “설거지는 누가 하실래요?"  

다예

#고부갈등#남녀차별#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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