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15화- 누구에게나 끝은 오니까
나 역시 천천히 해나가야겠다


집에 도착하자 아빠는 안 계셨다. 식탁에 있는 큰 카스텔라 봉지가 눈에 띄어 동생에게 물으니 아빠의 저녁 식사란다. “아빠 빵 안 좋아하잖아!” 카스텔라의 전말은 이랬다. 아빠는 신부전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 투석을 받으러 가는데, 그날따라 무화과가 당겨 잔뜩 먹고 병원에 갔다.
그런데 투석을 받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고, 의사로부터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맵고 짠 음식은 당연히 안 되고, 이도 저도 다 안 돼서 결국 빵을 먹게 됐다고 했다. 저녁에 돌아온 아빠에게 이것저것 묻자, 아빠는 혈관 확장 수술을 받은 왼쪽 팔을 만져보라고 내밀었다.
주삿바늘 자국이 팔뚝 가득 어지럽게 남아있었다. 손을 갖다 대자 ‘찌르르’ 울림이 느껴졌다. 진공 상태 같기도 하고,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여진 같기도 했다. 투석 후엔 어지러워서 계속 누워 있어야 한다, 그날 일 못 하는 게 아깝다, 병원에서 투석 횟수를 세 번으로 늘려야 한다고 하더라….

아빠는 12월에 있을 이사 준비나 잘 하라고 핀잔을 줬다. “그럼 봄에 가요. 쟤한테 운전 맡기고. 아빠는 편하게 앉아만 있어요.” 아빠는 웬일로, 못 이기는 척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년 봄, 우리는 두 번째 가족 여행을 가게 되었다. 나는 세 밤을 더 자고 서울로 돌아왔다.

더 많은 모습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 누구에게나 끝은 찾아오니까, 나 역시 천천히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봄날의 제주에서 유채꽃 앞에 서 있는 아빠를, 바닷가를 걷는 아빠를, 회를 맛있게 먹는 아빠의 웃는 얼굴을 남겨놓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830호 – 독립일기]
Illustrator 이다혜
#20대 고민#830호#830호 대학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