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독점적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들

사랑은 미리 양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얘도 좋고 쟤도 좋아, 왜 한 사람만 좋아해야 해?
폴리아모리. 아마 생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여럿을 의미하는 ‘Poly’와 사랑을 의미하는 ‘Amory’의 합성어. 우리나라에는 ‘비독점적 다자 연애’ 정도로 해석돼왔다. 다자 연애라니! 지금 바람피우는 것을 정당화할 생각인가?

   

딱히 그럴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꿈꾸는 ‘해바라기’ 연애가 너무나 불편했던 내 얘기를 털어놔볼까 한다. 독점 연애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우선 편의상, 나는 게이다. 연애는 22살이 되어서 처음 해봤다. 그때만 해도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반드시 연애로 이어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호감을 고백하고, 일대일 관계에서 사랑을 만들어가면서 주위의 인정을 받는 전형적인 연애상.

그런데 문제는 연애라는 문턱을 넘어오자마자 숨이 막히고 불편했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연애라는 형식의 제약과 구속, 의무 등이 내 가슴을 너무 답답하게 했다.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더니 난 일대일 연애라는 형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런 관계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고유한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과 고유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되진 않는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고유한 감정, 관계,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어떻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는가. 결국 이 고민을 그 당시 애인에게 전달했다.

그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을에 시작된 우리의 연애는 겨울이 다가올 무렵 끝이 났다. 당시 그는 장문으로 나에게 욕 한 바가지를 퍼부었다. 지금은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첫 이별 후, 나는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상한 걸까? 헤어진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넌 날 좋아하는 게 아니야.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너도 모르게 그 사람만 쳐다보게 돼 있어. 그만큼 좋아하지 않으면 그건 연애할 만큼의 사랑은 아닌 거지.” 너무나 설득력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사랑과 관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고민하고 싶었고, 그 생각을 도와줄 만한 매개가 필요했다. 내 고민을 듣고 한 레즈비언 친구가 자신을 폴리아모리로 정체화한다고, 너도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후 폴리아모리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폴리아모리에는 한 사람이 꼭짓점이 되어 여러 사람을 만나는 형태의 비이, 세 명이서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는 트라이어드, 네 명의 쿼드, 그 이상에 해당하는 몰섬, 이런 식으로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다.

사랑하는 관계를 굳이 ‘연애’라고 명명하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하며 자유롭게 사랑하는 이들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겐 여러 사람과 사랑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죄의식이 필요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히 타자일 필요가 있다
  그 후부터 난 행복한 폴리아모리 삶을 살았다. 한편으로는 폴리아모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이렇게 독점적인 사랑을 지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다른 폴리아모리와 만나는 것이 좀 어려웠을 뿐, 내가 필요로 하는 관계를 자유롭게 합의하며 만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이 갖는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폴리아모리는 반드시 다자 연애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마 의역 자체가 ‘비독점적 다자연애’라고 돼 있기 때문일 텐데, 사실 폴리아모리에겐 다자 연애뿐 아니라 연애조차도 필수적이지 않다. 폴리아모리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을 비독점적으로 이해하거나 실천한다’는 사실 하나다. 다자 연애는 부수적인 결과물 중 하나일 뿐이다.

사랑을 독점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본성에 어긋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자연적으로 비독점적이다. 반대로 독점 연애야말로 문화적 학습의 산물이다. 내가 마주치는 수많은 강렬함 중에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 지칭한다면, 우리는 사실 수많은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사랑은 도처에 깔려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별자리를 그리듯 다양한 관계망을 횡단하며 사랑하는 우리에게, 그것을 적절히 설명할 상상력과 역량을 키울 시간이 없었던 것뿐이다. 난 이런 측면에서 우리 모두 폴리아모리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보통 우리는 사랑에 총량이 있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미리 양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처한 관계망마다 새롭게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다. 난 상대가 맺을 관계망들을 긍정한다. 상대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도 만나는 남자친구가 한 명 있는데, 우리는 여러 대화 끝에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어떤 관계가 등장하든 이 사람과 나의 관계는 고유하고, 서로를 애정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행복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히 타자일 필요가 있다. 유한한 삶에서 다가오는 사랑을 억지로 차단하는 것보다 그 사랑을 충분히 즐기는 게 이득 아닐까.

실제로 오히려 한 가지 관계에 매몰되지 않은 것이, 각각의 고유한 관계에 도움이 되었다고 증언하는 폴리아모리 친구들도 많다. 사랑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시간과 체력을 적절히 안배할 수 있는 노하우만 좀 얻는다면, 우리는 더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두 명이 서로 같아지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우린 애초에 타인이다. 타자인 서로의 고유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힘이 있다면, 다자간의 사랑을 이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내가 어떤 관계망을 필요로 하는가’를 아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다채로운 상상력일 뿐이다.

[831호 - 20's ㅇㄱㄹㅇ]

Intern 김영화 movie@univ.me Interviewee 심기용 『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의 공동저자인 심기용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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