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지금은 물 떠다 주는 내가 20대에 했던 고민은
12년 전의 나를 만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
1. 물 떠다 주기 담당 “오빠, 물!” 아내가 이렇게 외치면 나는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냉장고로 향한다. 작은 유리잔에 물을 따라 아내에게 건넨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가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있는 내게 이런 카톡이 오기도 하는데….
[어디냐? 와이프 목말라 죽어.] “뭐야, 벌써 일어나?” “나 일이 좀 생겨서. 먼저 들어갈게.” 결혼 직후 우리 부부는 집안일을 분담했다. 화장실 청소는 나, 빨래는 아내, 음식물 쓰레기 처리는 나, 요리는 아내, 설거지는 나, 물 떠주기 나.
왠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물 떠주기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더니 와이프 왈, “사람이 물 마시는 게 중요하다고 하잖아.” “그렇지.” “나도 하루 9잔씩은 물을 마셔야 하고.” “그렇겠지.” “내가 물을 못 마시면 안 되잖아.” “안 되지.” “그래서 오빠가 물을 떠줘야 하는 거야.” “아~ 맞네.” 그래서 5년째 물을 따르고 있다.
와이프에게 물 따라주는 건 하루 평균 평일 1잔, 주말 3잔. 밥 먹으며 함께 물 마시는 건은 뺀 숫자다. 1년이 52주, 5년이면 대략 2860잔이다. 사실 처음엔 귀찮았지만, 이제 그런 단계는 지났다. 화장실 가면서 귀찮아하지 않듯 딱히 무슨 생각이 들진 않는다. 다만 약간의 지루한 감이 있어, 깨알같이 변주하며 재미를 추구하고 있다.
물 잔도 다양하게 써보고, 물 잔을 여러 가지 스타일의 쟁반과 어울리게 매치해본다. 북유럽 스타일 물 잔+쟁반, 일본 스타일 물 잔+쟁반. 이태원에 있는 편집숍 디앤디파트먼트에서 작고 미니멀한 유리잔을 샀는데 어울리는 쟁반이 없어 고민하던 중 딱 어울리는 아담한 남색 플라스틱 트레이를 발견했다. 뛸 듯이 기뻤다.
‘어서 물을 줘야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물만 떠주고 휙 돌아서진 않는다. 일단 두들겨 맞기도 하겠거니와, 그보다는 빈 잔을 싱크대에 넣어놓으려는 이유에서다(설거지 담당은 나). 누군가 물 마시는 모습을 멀뚱멀뚱 2860번쯤 보고 있자면 그 사람만의 고유한 물 마시는 자세도 알게 된다.
아내는 눈을 똑바로 정면으로 향한 채 고개를 재빨리 휙 위로 올린다. 굳이 묘사하자면 잔을 입에 댄 채 갑자기 뒤로 쓰러지는 모양새다. ‘낙차를 최대화해 물을 넘기려는 건가?’ 구경하는 것도 사소한 재미다.
2. 고양이에게 혼나는 개는 뚠뚠 아내는 고양잇과다. 단발머리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도 고양이 같고, 소파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모습도 영판 고양이. 머리숱이 많아 털 빠지는 것도… 이건 취소. 자기가 원할 땐 다가오지만, 평소 (사실상 하루 대부분) 귀찮을 땐 누가 가까이 오면 거부 의사를 단호한 표정으로 표현한다.
고양잇과답게 자기 선호와 자기주장이 강해서 주로 하는 말은 “OO 싫어!” 반면 난 개과다. 많이 멍청한 시바 견. 덩치도 꽤 큰 편이고 표정도 뚠뚠하다. 누가 다가온다고 피하거나 귀찮아하진 않는다. 무던하게 받아준다. 남의 주장에도 “뭐, 그렇다면 그렇겠지”라며 쉽게 수긍한다. 반면, 무심한 개과답게 상대의 메시지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이 사람이 지금 왜 이러지? 막상 알아차려 봤자 어찌 반응할지 몰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다. 며칠 전 아내 기분이 나쁜 것 같아,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재밌는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꺼내보았지만 “오빤 그런 이야기를 꼭 지금 해야 해?” “아니지. 꼭 지금 할 필요는 없는 이야기지. 미안.” 뚠뚠.
3. 별로인 날의 생선 결혼한 남녀들은 흔히 어쩌고저쩌고 결혼에 대한 일반론을 펼치곤 하는데, 미혼인 독자 여러분은 딱히 귀 기울여 듣지 말길 권한다. 고정관념에 얄팍한 자기 경험을 덧댄 단견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결혼한 여자는 감정 기복이 심하다’.
내가 경험한 아내는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다. 늘 동일한 수준으로 화가 나 있다. 기분 좋음 수치 10점 만점에 3~4점대가 꾸준히 유지된다. 기복이 심하다니 무슨. ‘여자는 기분 나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기분 나쁜 시기가 있는 것이다.’ 이것도 내 경우엔 틀린 팩트. 아내는 늘 정확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어 기분이 나쁘다. 집에 있는 시바 견 따위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을 뿐.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분이 좋아지신다. 결국 모든 부부는 고유한 특성이 있고, 고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우리 집의 문제 해결법은 생선 구워 먹기다. 귀납적 방법으로 발견했다.
생선을 먹으니 아내가 욕을 하지 않았다. 생선을 먹었더니 아내가 웃었다. 생선을 먹었더니…. 상황이 꼬인 날엔 함께 마트에 가서 그날 먹을 생선을 고른다. 칼질한 후 레몬이나 허브를 얹고 오븐에 굽는다. 살결이 찰진 참돔도 좋고, 기름진 눈볼대도 좋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안 경제가 파산에 이른 적이 있는데, 큰맘 먹고 민어를 먹는 호사를 부렸더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무슨 일이든 잘 풀릴 것처럼.
4. 과거의 나를 만나다면 내 20대 중반은 온 삶이 몽땅 고통, ‘일체개고’라 여길 만큼 힘들었다. 고통의 중심엔 불안이 있었다. 특별한 능력 없이 세상 잉여로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며, 더 들어가면 내가 기껏 이어가는 삶이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술만 퍼 마시던 1년이 있었고, 게임으로 뇌를 마비시키던 6개월도 있었다.
26살의 겨울엔 “나는 누구이고, 세상에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걸 찾자.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철학 책을 들고 도서관에 파묻혔는데. 지금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12년 전의 나를 만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10년 후 넌 어차피 와이프 물 떠다 주고 있을 거야. 너무 고민 말고 적당히 해.” 고양이 같은 아내 물 떠다 주고, 생선 구우며 지낼 줄 알았으면, 마음 편히 하고 싶은 거나 할 걸. P.S. 어차피 여러분도 10년 후엔….
[어디냐? 와이프 목말라 죽어.] “뭐야, 벌써 일어나?” “나 일이 좀 생겨서. 먼저 들어갈게.” 결혼 직후 우리 부부는 집안일을 분담했다. 화장실 청소는 나, 빨래는 아내, 음식물 쓰레기 처리는 나, 요리는 아내, 설거지는 나, 물 떠주기 나.
왠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물 떠주기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더니 와이프 왈, “사람이 물 마시는 게 중요하다고 하잖아.” “그렇지.” “나도 하루 9잔씩은 물을 마셔야 하고.” “그렇겠지.” “내가 물을 못 마시면 안 되잖아.” “안 되지.” “그래서 오빠가 물을 떠줘야 하는 거야.” “아~ 맞네.” 그래서 5년째 물을 따르고 있다.
와이프에게 물 따라주는 건 하루 평균 평일 1잔, 주말 3잔. 밥 먹으며 함께 물 마시는 건은 뺀 숫자다. 1년이 52주, 5년이면 대략 2860잔이다. 사실 처음엔 귀찮았지만, 이제 그런 단계는 지났다. 화장실 가면서 귀찮아하지 않듯 딱히 무슨 생각이 들진 않는다. 다만 약간의 지루한 감이 있어, 깨알같이 변주하며 재미를 추구하고 있다.
물 잔도 다양하게 써보고, 물 잔을 여러 가지 스타일의 쟁반과 어울리게 매치해본다. 북유럽 스타일 물 잔+쟁반, 일본 스타일 물 잔+쟁반. 이태원에 있는 편집숍 디앤디파트먼트에서 작고 미니멀한 유리잔을 샀는데 어울리는 쟁반이 없어 고민하던 중 딱 어울리는 아담한 남색 플라스틱 트레이를 발견했다. 뛸 듯이 기뻤다.
‘어서 물을 줘야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물만 떠주고 휙 돌아서진 않는다. 일단 두들겨 맞기도 하겠거니와, 그보다는 빈 잔을 싱크대에 넣어놓으려는 이유에서다(설거지 담당은 나). 누군가 물 마시는 모습을 멀뚱멀뚱 2860번쯤 보고 있자면 그 사람만의 고유한 물 마시는 자세도 알게 된다.
아내는 눈을 똑바로 정면으로 향한 채 고개를 재빨리 휙 위로 올린다. 굳이 묘사하자면 잔을 입에 댄 채 갑자기 뒤로 쓰러지는 모양새다. ‘낙차를 최대화해 물을 넘기려는 건가?’ 구경하는 것도 사소한 재미다.

2. 고양이에게 혼나는 개는 뚠뚠 아내는 고양잇과다. 단발머리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도 고양이 같고, 소파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모습도 영판 고양이. 머리숱이 많아 털 빠지는 것도… 이건 취소. 자기가 원할 땐 다가오지만, 평소 (사실상 하루 대부분) 귀찮을 땐 누가 가까이 오면 거부 의사를 단호한 표정으로 표현한다.
고양잇과답게 자기 선호와 자기주장이 강해서 주로 하는 말은 “OO 싫어!” 반면 난 개과다. 많이 멍청한 시바 견. 덩치도 꽤 큰 편이고 표정도 뚠뚠하다. 누가 다가온다고 피하거나 귀찮아하진 않는다. 무던하게 받아준다. 남의 주장에도 “뭐, 그렇다면 그렇겠지”라며 쉽게 수긍한다. 반면, 무심한 개과답게 상대의 메시지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이 사람이 지금 왜 이러지? 막상 알아차려 봤자 어찌 반응할지 몰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다. 며칠 전 아내 기분이 나쁜 것 같아,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재밌는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꺼내보았지만 “오빤 그런 이야기를 꼭 지금 해야 해?” “아니지. 꼭 지금 할 필요는 없는 이야기지. 미안.” 뚠뚠.
3. 별로인 날의 생선 결혼한 남녀들은 흔히 어쩌고저쩌고 결혼에 대한 일반론을 펼치곤 하는데, 미혼인 독자 여러분은 딱히 귀 기울여 듣지 말길 권한다. 고정관념에 얄팍한 자기 경험을 덧댄 단견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결혼한 여자는 감정 기복이 심하다’.
내가 경험한 아내는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다. 늘 동일한 수준으로 화가 나 있다. 기분 좋음 수치 10점 만점에 3~4점대가 꾸준히 유지된다. 기복이 심하다니 무슨. ‘여자는 기분 나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기분 나쁜 시기가 있는 것이다.’ 이것도 내 경우엔 틀린 팩트. 아내는 늘 정확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어 기분이 나쁘다. 집에 있는 시바 견 따위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을 뿐.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분이 좋아지신다. 결국 모든 부부는 고유한 특성이 있고, 고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우리 집의 문제 해결법은 생선 구워 먹기다. 귀납적 방법으로 발견했다.
생선을 먹으니 아내가 욕을 하지 않았다. 생선을 먹었더니 아내가 웃었다. 생선을 먹었더니…. 상황이 꼬인 날엔 함께 마트에 가서 그날 먹을 생선을 고른다. 칼질한 후 레몬이나 허브를 얹고 오븐에 굽는다. 살결이 찰진 참돔도 좋고, 기름진 눈볼대도 좋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안 경제가 파산에 이른 적이 있는데, 큰맘 먹고 민어를 먹는 호사를 부렸더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무슨 일이든 잘 풀릴 것처럼.
4. 과거의 나를 만나다면 내 20대 중반은 온 삶이 몽땅 고통, ‘일체개고’라 여길 만큼 힘들었다. 고통의 중심엔 불안이 있었다. 특별한 능력 없이 세상 잉여로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며, 더 들어가면 내가 기껏 이어가는 삶이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술만 퍼 마시던 1년이 있었고, 게임으로 뇌를 마비시키던 6개월도 있었다.
26살의 겨울엔 “나는 누구이고, 세상에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걸 찾자.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철학 책을 들고 도서관에 파묻혔는데. 지금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12년 전의 나를 만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10년 후 넌 어차피 와이프 물 떠다 주고 있을 거야. 너무 고민 말고 적당히 해.” 고양이 같은 아내 물 떠다 주고, 생선 구우며 지낼 줄 알았으면, 마음 편히 하고 싶은 거나 할 걸. P.S. 어차피 여러분도 10년 후엔….
[832호 - think]
Illustrator 키미앤일이
#832호#832호 think#832호 대학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