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생후 259개월, 12개월의 휴학을 선언하다

나로 사는 법을 알려준, 알려줄 12개월

“너는 252개월을 살았어. 그리고 너의 휴학은 12개월이지. 살아온 날에 비하면 이 12개월은 크지 않아.” 생일 편지에 친구가 써 준 말이었다. 그 말을 읽고 서럽고 고마워서 울어버렸다. 겨울 같던 3월, 부모님께 휴학 허락을 받은 지 꼭 한 달이 됐을 때였다.

 

휴학을 생각한 건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이다. 그만큼 예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다. 나는 12년 동안 ‘곧 죽어도 학교에서 죽자’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생각이 옳은 것이라 굳게 믿었으며 그 믿음에 따라 행동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게 고작 생리통 참는 법이라는 걸 영영 깨닫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지금까지 개근에 목매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됐다. 다양한 사람들 틈에서 나름 신나면서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몸과 마음의 체력이 다했다고 느꼈을 때 깨달았다. 이 정도로 에너지를 쏟을 경우 2년 정도는 버틸 수 있구나. 혹은, 이렇게 살면서 내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딱 2년 정도구나. 나를 다독여주던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부모님 앞에 섰다.

 

“나 휴학하고 싶어. 아르바이트 해서 여행도 가고 자격증 공부도 할 건데, 사실은 힘들어서…”라고 말했다. 부모님은 세상에 힘들지 않은 게 어디 있느냐고 하시면서 다른 이유를 물어보셨다. 쉬고 싶었던 날들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냥 ‘그랬구나’ 라고 한마디만 해주면 안 돼?”라고 따져 물었다.

 

가족들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나는 울고 있었다. 그동안 원체 학교 이야기를 안 해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취업 준비나 유학과 같은 이유로 쉬는 게 아니라서 당장의 반응이 두렵고, 휴학의 이유를 납득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내 몸과 마음이 휴식을 원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긴 상의 끝에 허락을 받았다. 도망치듯 휴학을 하고 나니 가슴께에서 묵직하게 웅얼거리던 것들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정말 처음 겪어보는 행복감이었고 오로지 나를 위한 12개월의 시작이었다. 휴학하기 전에 장학금으로 노트북을 샀었다.

 

쉬기 시작하면서 그걸로 글도 쓰고 알바 자리도 알아보고 비행기 티켓도 구해서 좋아하는 영화의 배경지로 여행도 갔다. 그게 4월 말이었다. 5월이 되어서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돈을 더 모으고 싶었다. 집 근처에 디자인 문구 직영점이 생겼는데 그 매장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로드숍에서 일했던 경험을 인정받아 바로 채용되었다.

 

사람이 많이 오는 날도 적게 오는 날도, 마주칠 때마다 반말을 하며 괴롭히는 진상도, 매장 유리벽 너머로 빤히 쳐다보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일주일에 4일을 일했고 5개월 뒤 본사에서는 10월까지만 나오라고 하면서 10월이 되기 닷새 전에 카톡으로 나를 잘랐다. 딱히 ‘믿는 도끼’도 아니었건만 막상 발등을 찍히고 보니 꽤 아팠다.

 

부당해고로 신고하려고 해도 신고 기준에 맞지 않아 손쓸 수 있는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화나고 속상한 나를 달래는 일뿐이었다.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가 겪었을 일이고 나는 그저 그 사건을 지나치던 사람일 뿐, 그 회사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야.’ 생각보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땐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이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그건 반대로 그동안 내가 스스로를 꾸짖었던 날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곧 겉옷 하나만으로는 견디기 힘든 날들이 올 것이다. 그렇게 손 시리고 발 시린 날들이 지나면 세상이 하얀 겉옷을 벗고 봄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도 휴학이라는 옷을 벗고 가볍게 학교로 돌아가게 될 거다.

 

사실 가볍다는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 또 힘든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화나는 일에 얼굴 붉히며 살게 될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괜찮을 것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어제보다는 내가 어떤 일들에 더 자극적으로 반응하고 무디게 반응하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서워하는지, 그럼에도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일을 힘들어하는지, 그 과정에서 날 어떻게 위로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로 259개월째 살고 있는 나에게 12개월의 휴학은 그렇게 크지 않다. 그렇지만, 나로 사는 법을 알려준, 알려줄 12개월이 정말 소중하다.


[832호 - 20's voice]

writer 이주영 ayjy0315@naver.com 

저는 저입니다. 당신은 당신이고요.

#20's voice#20대 칼럼#8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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