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돌아오는 순간의 기분을 위해 떠나기『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일상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것

오랜만에 제주에 갔다. 우연히 알게 되어 오랫동안 혼자 좋아한, 그래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던 개가 있었는데(진심입니다), 마침내 만났고 함께 산책을 했다. 그러고 나자 제주에 온 이유가 채워지고 말았다. 이제 무얼 할까- 하고 숙소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런 순간이 사실 여행에서 제일 근사한 순간이다. 오늘 하루가 이렇게 비어 있는데 어떡하지, 하면서 흐흐 웃는 순간. 여행 첫날 오름에 올라간 게 그나마 가장 활동적인 일이었다. 이튿날부터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뒹굴다가 공용 공간인 카페에 앉아 만화책을 보거나, 현관 앞에 누운 개가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를 녹음하거나 했다.
누가 오늘 뭐 했어, 묻는다면 우물쭈물하고 말 조용한 하루. 텅 비어 있어서 조용히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더 촘촘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눈엔 ‘고작 그런 걸 하는 거야?’ 싶을지도 모를, 나는 그런 여행이 좋다. 여행지에서 ‘해야 할 일’은 하루에 하나씩만 정해둔다. 그것도 시시하긴 마찬가지다.

처음 맛보는 맥주를 마셔보거나, 멋지다고 전해 들은 어떤 풍경을 보러 가거나. 그 외의 시간은 비워둔다. 우연이 들어올 틈이 생기도록.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날도 그렇지 않은 날도 있지만, 그런 여행 뒤엔 늘 무언가를 회복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씨네21」 이다혜 기자가 쓴 여행 에세이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는 그렇게 편도가 아닌 ‘닫힌 원’ 모양의 여행을 반복해서 떠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여행이 일상을 벗어난 아주 특별한 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연장’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그저 ‘다음에 해야 할 일’ 없이 살아보기 위해 나를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가는 사람들, 그리고 아래 이어지는 문장에 속으로 밑줄 그을 사람들.
“떠났을 때만 ‘나’일 수 있는 사람들은 나름의 행복을 찾은 이들이겠지만, 나는 떠났을 때만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결국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는, 나라는 인간의 통일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여행이다. 이곳에서의 삶을 위한 떠나기.”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 별것 아닌 것들을 하고 싶어지는 조그만 의욕이 샘솟는 순간이 늘 좋다.
아는 거리를 걷고, 아는 얼굴을 만나고, 단골 카페에 들르는 그런 일. 익숙해서 지루하게 여겨지던 일상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것 외에 여행에 더 많은 이유가 필요할까. ‘여기’에서 찾지 못할 행복이라면 그건 거기에도 없을 것이다.

[833호 - Weekly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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