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그 해 여름의 얼굴

나는 그날 새카맸던 엄마의 얼굴을 기억한다.
나는 그날 새카맸던 엄마의 얼굴을 기억한다. 내 얼굴은 환하다. 그게 꽤 맘에 들었다. 엄마를 닮아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엄마의 얼굴은 환하다기보다 ‘어둡다’에 더 가깝지만 엄마의 예전 사진이나 가끔 옷 밖으로 드러나는 하얀 팔다리를 볼 때면, 원래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젠가 샌들 너머 엄마의 새하얀 발등을 본 날, 처음 생각했던 것 같다. ‘역시 나는 엄마를 닮아서 환한 얼굴을 가진 거구나.’ 그런데 지금 엄마 얼굴은 왜? 모의고사를 망친 고3의 여름날, 그대로 집에 가기 싫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나를 짓눌렀다. 누가 왁! 하고 놀랜 것처럼 심장이 쿵쿵 떨어지고 손발이 저렸다.

집에 그냥 갈 수 없었던 나는 지하철을 타고 엄마의 직장 앞으로 갔다. 시험은 오후 일찍 끝났기 때문에 엄마 일이 끝나는 6시까지 어딘가에서 기다려야 했다. 압구정 맥도날드. 둥그런 통유리를 가진 패스트푸드 매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건너편에 화려한 극장이 보였다.

나는 통유리 안에 허탈하게 앉아 맞은편 극장 로고에 둘러진 예쁜 모양의 반짝반짝 화려한 전등을 보며 다신 돌이키지 못할 뭔가를 저지른 것처럼 엉엉 울었다. 맥도날드에 들어오며 내 모습을 본 엄마의 얼굴이 새카맸다. 엄마는 까만 얼굴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몇 달 전 해결됐다고 얘기했던 사고가 사실은 해결된 게 아니었다고, 너 마음 편하라고 한 거짓말이었다고. 그 일을 해결하느라 너무 힘이 든다고. “너까지 이러면 엄마가 너무 힘들어.” 겨우 울음을 참는 까만 얼굴로 엄마는 말했다. 엄마는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서가는 엄마를 따라 나는 천천히 걸었다. 결국 엄마는 그날 울지 않았다.

스물넷이 된 여름날, 나는 압구정에 볼일이 생겼다. 내 얼굴은 여전히 환했다. 공들여 화장해서 예전보다 더 환한 얼굴로 나다녔다. 약속이 취소되어 투덜거리던 나는 들고 온 책을 한 카페에 들어가 읽을 작정이었다. 길을 건너는데 동그란 유리 외벽인 맥도날드가 보였다. 그 벽을 보고 있자니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혹시 거기인가? 건너편을 보니 극장이 있다. 극장 로고에 둘러진 예쁜 전등도 그대로다. 맞구나, 엄마의 예전 직장이 있던 곳. 카페에 앉아 책을 보면서도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건너편의 맥도날드를 바라보았다. 저기서 울었던 게 벌써 5년 전이다. 5년 전. 심장이 자꾸만 떨어지는 해였다.

모의고사 채점지 위에 그어지는 빗금 수가 내 인생에 그어지는 빗금 수로 느껴지던 때. 친구들은 장난삼아 자기 시험지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야! 시험지에 비 와!”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나도 비만 오는 인생을 살게 되는 거 아닐까? 난 지금까지 한 게 이것밖에 없는데, 이것마저 못 하면 어쩌지. 수능을 망치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걸까? 그건 아니라고 수많은 어른들이 어른스럽게 말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어린 고등학생 소녀가 느끼기에 세상은 좀 이상했다. 수능 따위 별것 아니고 살다 보면 훨씬 더 큰 역경들이 많다고 말하면서도, ‘수능 따위’를 망치면 네 인생도 망칠 거라는 불안감을 노골적으로 주입시켰다. 썩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동안 나는 한 차례 수능을 망치고, 두 번째 수능을 또 못 보고, 어찌어찌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곧 졸업한다.

사고도 해결되고 집안은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5년간 심장이 떨어지고 손발이 저린 기분을 종종 느꼈다. 겨우 이십 몇 년이지만 지금껏 겪어왔던 세상 덕분에 앞으로도 수백 번 더 내 심장이 쿵쿵 떨어질 거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무섭지 않다. 괜찮다.

열아홉살 때처럼 인생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신 얼굴이 점점 까매지겠지, 우리 엄마처럼. 엄마도 원래는 나처럼 얼굴이 환했으니까. 누가 그러더라. 얼굴빛이 어두워진다는 건 단단해지는 거라고. 왜 꼭 단단해져야 하지? 엄마의 그 환하던 얼굴이 까매졌다는 게 억울했다.

나는 언제까지 지금의 환한 얼굴로 살 수 있을까. 이 환한 얼굴을 일단은 지켜보려고 한다. 언젠가 내 얼굴의 빛이 바래면 거울을 보며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겠지. 그래도 안다. 내 얼굴이 엄마처럼 되면 세월에 바랜 얼굴색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만큼 마음이 단단해질 거라는 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안에 씁쓸함과 함께 무언가 단단한 게 차오르는 걸 느낀다.

연약하지만 강한 게. 5년이 흘렀다. 지난여름, 나는 맥도날드 맞은편 카페에 앉아 있었다. 에어컨에선 시원한 바람이 불고, 읽고 있던 책이 재미있어서 몇 번이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가끔씩 창밖의 맥도날드를 가만히 쳐다보지만 그뿐이다. 곧 맥도날드에 대해 잊어버린 채 카페를 나섰다.

[833호 - 20's voice]

writer 구본슬 bonsle@naver.com차라리 꽃잎이 지고 계절이 변하더라도.
#20's voice#20대보이스#20대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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