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산수유가 아니라 오미자라고요

아, 사장님! 이게 산수유가 아니고...
2014년 7월 12일. 그날을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시 GOP에서 군 복무 중이었던 나는 근무 인원이 부족하여 한 달 동안 연속으로 근무를 섰다. 그랬기에 비번은 정말 사막의 단비 같았고 12일은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바로 그날이었다. 게다가 날짜는 우연히도 토요일. 환상적이었다.

날도 선선하고 기분도 좋아 가족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어, 아빠! 뭐해? 날씨도 좋은데 방에서 컴퓨터로 고스톱 치고 있는 건 아니지?” 돌아온 대답은 예상을 빗나갔다. 빗나가도 한참 빗나가 아직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 “아빠 귀농해서 밭 갈고 있다.” 그랬다. 아버지께서 귀농을 하신 것이다.

예전부터 아버지가 뭔가 하나 결정하면 가족과 의논도 없이 결정한 대로 밀고 나간다는 것은 직접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선택의 성공 확률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게다가 당시 아버지는 분명 나름 잘나가는 기업을 다니고 계셨는데 갑자기 귀농이라니. 내가 전화를 안 했던 것도 아니고 꽤나 자주 통화했는데 어떻게 귀띔 한번 없었는지 당시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익숙해서일까. 비교적 담담했다. 아버지에게 뒤통수를 맞은 충격은 쉽게 가라앉았다. 일단 어디서 뭘 키우기로 했는지 물어봤다. 경상남도 거창에서 오미자 농사를 한단다. 음. 오미자. 다섯 가지 맛이 있어서 오미자(五味子)라고 부른다는, 얕은 상식 정도는 들어봤다. 근데 그 다섯 가지란 게 당최 무슨 맛인지, 언제 수확하는지, 가격은 어느 정도 하는지 아는 게 없다.

   

아니 무엇보다도 거창을 고른 이유는 대체 뭐지? 오미자는 문경이 유명하지 않나? 의문투성이였지만 지금 밭을 갈고 계신다니 일단 건강 잘 챙기시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날 밤은 유난히 길었다. 어차피 오지 않는 잠, 불침번을 자처하며 계속 생각했다. 암청색의 하늘에 주황색 햇빛이 수놓일 무렵, 기억의 조각들이 점차 맞춰졌다.

고등학교 시절, 퇴근한 아버지 책상에 올려져 있던 A4용지 뭉치들. 거기엔 비닐하우스 치는 법, 지역별 특산물 리스트, 각 부지의 매입가들이 빼곡히 인쇄되어 있었다. 그 결정이 결코 단김에 빼버린 쇠뿔이 아니란 것을 그제야 알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태까지 날 키워준 가장을 믿어주고, 시간 날 때마다 일손을 돕는 것뿐이었다.

농사일에 큰 도움이 안 된다면 영업이라도 열심히 뛰자! 제대로 영업을 하려면 판매할 제품의 정보에 대해 꿰뚫고 있어야 한다. 남들 아는 만큼만 안다면 영업사원 자격이 없지 않은가. 우선 아버지의 밥줄에 대해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의 이 빨간 열매는 얼핏 보면 산수유랑 비슷하게 생겨 혼동하기 쉽다.

둘 다 한국에서 나는 작물 아니랄까봐 부부 금슬에 좋고, 집중력도 향상시켜주고, 피로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 매실처럼 청을 만들어 먹는 방식이 있고 말려서 물에 우려먹는 방식이 있다. 실제로 판매용으로 나온 청을 물에 타서 먹어보니 오, 괜찮다. 대한민국 오미자 시장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문경산 오미자보다 당도와 맛의 깊이가 좋았다.

상품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도 1.5L에 2만 9000원.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해볼 만하지 않은가? 커피 값에 한 달 월급의 5분의 1가량을 허비했던 과거의 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카페라면 꽤 여러 군데의 단골 손님이었기에 사장님들에게 영업하기엔 크게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매번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탄산수만을 주문한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자연스레 오미자 청을 꺼내 섞는다. 그 희귀한 광경을 본 사장님들, 내게 묻는다. “어머, 어쩐지 커피를 안 마시더라. 재동씨, 그게 뭐예요? 산수유예요? 빠알간 게 되게 이쁘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한다. “아, 사장님! 이게 산수유가 아니고 오미자라는 건데요. 맛이 꽤 괜찮아요. 한번 시음해보실래요?”

[836호 - 20's voice]

writer 이재동 funny1231@naver.com

#20's voice#20대 에세이#8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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