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독립의 양면성

이사 후 본가에 처음 갔는데
밥을 먹다가 문득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아 이제 김치는 더 이상 얻어 오지 말아야겠다” 독립할 때 집에서 얻어 온 김치가 벌써 푹 익었다. 아직 냉장고에 한 통 그대로 남았는데…. 가족과 함께 살 땐 썰어서 반찬 통에 잔뜩 담아놔도 한 끼 식사고 나면 다 없어졌다. 그래서 혼자 먹어도 금방 동날 줄 알았다.

집에서 나오는 날, 한 통만 가져가라고 하는 아빠가 얼마나 야속했는지. 독립을 생각한 건 거의 1년 전부터다. 나이가 들고 내 정서가 독립적으로 변해가면서 아빠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이미 다 커버린 딸과 뒤늦게 친해지고 싶었던 아빠는 표현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말을 걸 거리가 없나 온 집안을 둘러보고 다녔다.

설거지 안 하니, 빨래 좀 널어라…. 관심 가져 달라는 투정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아빠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무시하고 눈조차 안 마주쳤다. 그렇게 서로 대화하다가 싸우기를 반복해 매우 지쳤고, 집에 들어가기도 싫단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빠와 나는 긴 대화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내가 집을 나가 독립하는 것으로.

첫 집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내가 둔 물건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내가 해둔 인테리어가 흐트러지지 않는 집. 쉬고 싶을 때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조용한 휴식 공간. 남의 집에 온 듯 어색한 건 아직 적응이 덜 돼서 그렇다고 믿고, 곧 원래 집보다 편해질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독립의 무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날 짓눌렀다. 나는 집에 채운 물건들은 모두 집주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몰랐다. 반찬이나 우유의 유통기한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나는 하나하나 배워야 했다.


냉장고의 음식을 제때 안 먹으면 상하고, 상하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구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면 종량제 봉투가 필요하고, 미리 봉투를 사 두어야 하는구나. 실수로 싱크대 배수구 마개를 덮지 않고 외출한 날, 온 집 안에 진동하는 고약한 냄새를 맡으며 가족과 함께 살던 때를 추억했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밤늦게 들어가 이렇게 외치곤 했었지. “집에 뭐 먹을 거 있어?” 이사 후 본가에 처음 갔는데 문밖에서 언니와 동생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훅 하고 따뜻한 숨이 쉬어졌다. ‘그래,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구나’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목소리와, 웃음소리. 치워도 금세 어질러지는 거실. 셋이서 TV를 보며 서로 덮겠다고 싸우던 이불. 끌어당겨 뽀뽀할 강아지. 독립 후 나를 괴롭혔던 공허함의 정체는 다름 아닌 가족의 부재였다는 게 피부에 와 닿았다. 지겹게만 느껴지던 것들이 실은 날 외롭지 않게 지탱해줬던 거다.

가을방학의 ‘동거’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우편함이 꽉 차 있는 걸 봐도 그냥 난 지나쳐 가곤 해요. 냉장고가 텅 비어있더라도 그냥 난 못 본 척하곤 해요.” “나는 부모님과 사니까요.” 나는 부모님과 사니까요는, 이런 뜻이었구나. 이사 준비가 한창일 때 아빠는 못내 서운한 듯 말했다. “너무 힘들면 독립 안 해도 된다”고.

“이미 집 계약까지 끝나서 안 된다”고 차갑게 답했다. 그렇게 나와 만난 건 독립의 가장 큰 산, 외로움이었다. 이렇게 철이 들어가나 싶다가도, 너무 빨리 세상에 나와버렸나 싶어 투정을 부리게 된다. 아마 모두에게 독립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 처음으로 다른 주소를 가지게 된 나와 아빠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그렇지만 곧 익숙해질 테다. 모두의 독립이 그런 것처럼.

[840호 - 20's voice]

WRITER 유하영 optetio@naver.com 꿈 취업 욕심 없고 마냥 놀고 싶습니다
#20대 보이스#20대 에세이#8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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