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행복한 망캐로 살아가기

인생이 RPG 게임이라면 난 이른바 망캐다
인생이 RPG 게임이라면 난 이른바 ‘망캐’다. 전략을 잘못 세워서 쓸모없어진 ‘망한 캐릭터’ 말이다. 어릴 적 내가 알던 세상은 매우 좁았고, 미래에 대한 선택지 또한 다양하지 못했다. 나는 그 선택지 중 하나를 막연하게 ‘나’라는 초보 캐릭터의 최종 목표로 설정했다. 그에 따라 하라는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와서는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는 인재가 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했다. 알바에, 학점 관리에, 대외 활동, 봉사 활동, 동아리 활동까지 해가면서 기계적으로 경험치 쌓기에 몰두했다. 플레이가 버겁고 지겨울 때면 좋아하는 음악과 책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렇게 겨우겨우 능력치를 쌓아서 아등바등 ‘레벨 업’을 했다. 다들 그만큼 하니까 나도 그래야만 이 세상 속도에 맞는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 플레이 동력은 약해졌고, 목표의식은 희미해졌다. 휴학을 했다. 잠시 쉬며 나를 점검할 요량으로.

스탯(게임 속 사용자의 능력 수준을 숫자로 나타내는 단위)창을 켜서 내 능력치들을 확인했다. 학점, 나쁘진 않았지만 엄청 좋지도 않았다. 재산, 당장 쓸 돈만 있었다. 어학 점수? 그럭저럭이다. 자격증? 그 흔한 운전면허도 없다. 봉사 활동은 잡다하고 형식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수상 경력은? 전무했다. 한숨이 나왔다.

이대로라면 ‘망캐’ 확정이다. 분명 뭔가 열심히 했는데 이상하게 성취는 없었다. 소중한 스탯이 엄한 곳에 분산된 게 분명했다. 범인은 음악, 영화, 인문학, 철학, 문학, 게임, 요가, 요리, 패션, 미용, 여행 등 나의 수많은 취미 생활과 관심사들. 게임 좀 즐기면서 해보려고 이것저것 들쑤셔놨더니, 온갖 잡다한 곳에 스탯을 낭비한 꼴이 된 거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은 많아지는데 그걸 따라갈 능력이 모자라다. 레벨에 비해 능력치가 안 좋아서 더 강한 몬스터는 잡을 수 없는 꼴이었다. 강한 몬스터를 잡을 수 없으니 경험치도, 레벨도 더디게 쌓여갔다. 이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당연히 없었다. 함께 몬스터를 잡을 길드나 파티도 물론 없었다.

난 ‘렙 값(레벨 값의 줄임말)’ 못 하는 ‘망캐’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떡하나. 이쯤 되면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새로 시작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인생은 실전이다. 게임이 아니라서 ‘망캐’를 버리고 새 캐릭터로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답은 하나다. 그냥 ‘망캐’임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

몬스터 때려잡는 일 말고, 짜인 스킬트리대로 스탯 찍는 것 말고,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닥치는 대로 사는 것. 지금이라도 나의 플레이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이제 와서 인터넷에 떠도는 게임 공략을 따른다고 해서 남들 같은 삶을 플레이할 수도 없을 테니까. 차라리 잘 된 것도 같다.

강하지도, 화려하지도, 쓸모 있지도 않은 캐릭터는 그만큼 자유롭다. 견제받을 일이 없으니 여유롭게 광장을 돌아다니며 특이한 무기도 사보고, HP(게임 속 체력, Healthpoint의 줄임말)를 넉넉히 채워둔 채 살아갈 수 있다. 어설픈 기타 실력을 가지고 거리에 나가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연주할 수도 있다.

‘그러다 뭐 될래?’ 하고 묻지 마라. 나는 그저 맛있는 블루베리와 훌륭한 음악, 사랑하는 사람들만 있으면 출석 체크만 하는 ‘망캐’로 살아도 행복한 사람이다. 무기력한 백수의 삶에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는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근데, 내 인생 내가 변명하는데 뭐. 망한 것도 서러우니까 우리 야박하게 굴지 말자.

[842호 - 20's voice]

WRITER 정의정 ego_ej@naver.com 되고 싶은 건 없지만, 하고 싶은 건 많다!   
#20's voice#20대 보이스#20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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