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히치하이킹으로 스페인 북부에서 파리까지

집시가 되고 싶었던 스페인 교환학생의 여행기
대학내일과 네이버포스트가 함께한 스타에디터 시즌 3에 선정된 ‘Iris Lee’님의 스페인 교환학생기 마지막 편입니다. 

 

우연을 찾아 떠나는 여행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교환학생으로 와서 정착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새로웠던 모든 것들이 일상으로 녹아들었다. 스페인 가족들과의 일상도, 전 세계에서 온 교환학생 친구들과의 학교생활도 모두 순조로웠다. 그렇게 겨울이 찾아왔다. 서퍼들로 붐비던 해변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동네 노인들만이 서성였다.

해 질 녘이면 크리스마스 조명들이 은은하게 빛났고, 늦은 시간까지 기말고사를 치른 학생들은 몸을 움츠리며 잰걸음을 쳤다. 그즈음, 나는 파울라라는 친구를 사귀었다. 바스크 빌바오 출신인 그녀는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간 적 있는데, 그때 한국에서 처음으로 히치하이킹을 해봤다고 했다.

이후 그녀는 열 달에 걸쳐 홍콩에서부터 스페인 빌바오까지 히치하이킹과 카우치 서핑만으로 돌아왔다. 이런저런 위험한 일도 많았다고 한다. 한번은 눈보라 치는 시골길에 핸드폰도 고장난 채 버려졌었는데, 우연히 그 동네 공무원들을 만나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난민 캠프에서 봉사를 하며 지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도움을 받던 처지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게, 나는 너무 좋았어.” 파울라는 그렇게 히치하이킹과 카우치 서핑을 하며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따스한 순간들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상기된 뺨이 나를 설레게 했다. 그렇게 나는 유럽에서의 첫 겨울을 장식할 방학 여행을 계획하게 됐다. 바로 히치하이킹-카우치 서핑만으로 이루어진 파리 여행.

구글맵으로 봤을 땐 짧디짧은 거리였다. 바스크에서 파리까지 차로 이동하면 여덟 시간. 사실 그 짧은 거리를 비행기로 가면 80유로 가까이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도 히치하이킹을 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잘 찾으면 4분의 1 가격으로도 갈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운이 안 따른 건지 스킬이 없는 건지, 저렴한 항공권과는 영 인연이 없었다.   예전에 항공권을 한참 찾아보다가 빈정이 상해 포기해버린 도시가 파리였다. 히치하이킹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파리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준비라고는 목적지를 적을 빳빳한 종이와 크레용, 배낭 하나뿐이었다. 출발은 산세바스티안에서 하기로 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한주 전만 해도 내내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그날 아침은 거짓말같이 맑았다. 히치하이킹에 대한 어떤 정보도, 경험도 없는 나는 무작정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다리 위에 자리를 잡았다. 반짝이며 흐르는 강과 그 끝에 탁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기다림이라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준비해온 푯말과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파울라의 몽당 연필. 목적지를 적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내 삶에 가장 위험천만했던 24시간의 기록

한참을 서 있었으나 차는 잡히지 않았다. 길을 지나던 한 가족이 도시 바깥쪽으로 2km 정도 걸어 나가면 차를 잡기 조금 더 수월할 거라며 조언해주었다. 그 말을 따라 걸어 나갔다. 도시 외곽에는 야트막한 산과 동화에 나올 법한 예쁜 집들이 많았다. 자주 오가던 도시에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모습들이 나를 더욱 들뜨게 했다. 길을 걷는 와중에도 많은 사람들과 말을 섞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가볍게 미간을 찡그리며 웃던 얼굴들이, 나보다도 설레하던 그 얼굴들이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출발지인 산세바스티안에서 몽토방까지 한 대, 몽토방 시내에서 파리로 향하는 톨게이트 입구까지 또 한 대. 모두 처음 보는 나를 위해 차를 세우고, 기꺼이 차의 방향을 틀어주기도 했고 또 진심으로 걱정해주기도 했다.

 

그들 덕분에 나이 든 다정한 모녀를 만나 조금 더 북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가는 길에 함께 조그마한 마을 빵집에 들렀다. 이제는 주름이 깊게 패여 엄마와 함께 늙어가는 딸이 어릴 때부터 제일 좋아하던 빵집이라고 했다. 두 모녀는 나에게 크로와상을 한 아름 안겨주며 전화번호까지 적어주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그래, 이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내가 이 짓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처음 먹어본 프랑스 크로와상은 태어나 먹어본 빵 중 제일 맛있었다. 모녀와 헤어지고 길 위에서 크로와상을 먹는데 어느새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서둘러 차 한 대를 멈춰 세웠고, 이 차를 마지막으로 그가 내려주는 동네에서 숙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어도 안 통하고 운전 내내 통화만 하던 그는 결국 나를 깜깜한 고속도로 무인 톨게이트에 내려주었다. 게다가 내린 곳이 파리로 가는 반대 방면이었기에 왕복 10차선은 돼 보이는 고속도로를 걸어서 횡단해야만 했다. 살면서 저지른 무단 횡단 중에 가장 위험천만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다리를 떨며 겨우 반대쪽으로 건너가 멈춰 세운 차 안에는 인자한 인상의 변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파리에 남편과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이 통했는지 어쨌는지 별일은 없었지만, 말도 안 통하는 노인이 자신이 싱글이며 내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어떻겠냐며 최선을 다해 이해시키려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그 노인의 차를 마지막으로 나는 밤 아홉시 경 파리로 가는 길의 중간 지점까지 오게 되었다. 더 이상 히치하이킹을 하는 건 무리였다. 다음 날 아침 첫 기차를 타고 파리로 가기로 결심했다. 낡은 기차역 대합실에 자리를 잡고 방전되었던 핸드폰을 충전하고 있는데, 카우치 서핑으로 만나기로 했던 구엔에게서 연락이 왔다. 파리에는 예정대로 잘 도착했냐는 것이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지금 기차역에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깜짝 놀라며 자신이 버스를 예매해줄 테니 그걸 타고 올라오라고 했다. 그 시간에 버스가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뛰쳐나갔다. 이 막차를 타지 못하면 집시들이 몸을 녹이던 기차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구글맵은 도무지 버스 정류장 위치를 잡아내지 못했다.

 

 

겨우 세운 차의 주인은 이곳 출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폰으로 검색해서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녀 역시 이런 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다. 구불구불하고 비좁은 비포장도로 위를 희미한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다. 경사도 꽤 가파른 것으로 보아 우리는 산으로 가고 있었다. 안개비가 내렸다.

 

그녀가 차를 멈춰 세웠다. 이름 모를 산의 등산로 입구였고, 자동차는 지나가지 못하게 막혀 있었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지도를 보니 숲 안에 왼쪽으로 빙 도는 길이 나 있었고, 그 길 끝의 출구쯤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여자는 왔던 길을 돌아가 다른 길을 찾자고 했지만 그러면 버스는 놓치게 될 것이다. 나는 가로등 불빛에 먼지 같이 반짝이며 날리는 안개비를 잠깐 바라보다가 내리겠다고 말했다.

 

여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결국 행운을 빈다는 말을 끝으로 차를 돌려 내려갔다. 비 내리는 밤의 산길에 혼자 있어본 적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핸드폰은 이미 방전 상태였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마지막으로 지도에서 확인한 둘레길 모양을 그려냈는지 모른다.

 

한 발 앞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어둠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둠에 슬슬 눈이 익어갈 때쯤 길의 끝을 알리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무사히 빠져나오긴 했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시간 안에 버스 정류장을 찾아야 했지만, 있어야 할 그곳에 정류장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길을 따라 내려가보니 작은 집 한 채가 보였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아무리 생각해도 민폐였지만 별수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초인종을 눌렀다.

 


파리의 우울, 그러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어준 남자는 산자락 아래 집에 사는 아기 아빠였다. 바들바들 떠는 나에게 밀크티를 한 잔 만들어주었고,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준 것을 마지막으로, 파리를 향한 히치하이킹은 끝이 났다. 파리로 향하는 밤 버스는 푸른 어둠과 적막으로 차 있었다. 그렇게 일곱 시간 후, 나는 마침내 에펠탑을 볼 수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에 낭만과는 거리가 먼 에펠탑과의 첫 만남이었지만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종일 파리를 걸어 다녔다. 카우치 서핑으로 머물기로 한 집의 주인인 구엔과 마리가 퇴근할 때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가가 너무 비싸 카페나 식당에 들어갈 엄두가 안 나기도 했고, 남들 다 간다는 랜드마크들도 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걸었다.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콩고드 광장, 퐁네프 다리, 그랑팔레와 쁘띠팔레, 몽마르트르 언덕…. 많이도 다녔다. 테러 위협으로 샹젤리제 거리 크리스마스 마켓은 취소되었고 날씨도 계속 오락가락했다. 배가 고파 사 먹은 케밥은 6유로나 했고, 그마저도 비를 피해 도망 다니며 허겁지겁 삼켜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는 기억을 따라가보면 몽마르트르 묘지가 떠오른다. 비를 피해 뛰다시피 해서 도착한 묘지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묘지 위를 지나는 철길인지 고가도로인지 그 아래에 선 채로 우걱우걱 케밥을 삼키며 험상궂은 표정의 노파가 묘지 사이를 누비는 모습을 보았다.
 

묘지를 채운 무덤들은 저마다 모양이나 크기가 제각각이라 조각 공원 같았다. 그녀는 그 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고 있었다. 그녀가 밥그릇을 내려놓자 네다섯 마리의 고양이들이 달려들었다. 갑자기 또 비가 그쳤다. 젖은 무덤에 해가 드는 모습을 보자 내 목덜미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따스하고 포근했다.

 

관광객들이 가득하던 인도 갠지스강보다도 더 삶 같고 죽음 같던 순간이었다. 그곳엔 에밀졸라의 무덤도 있었다.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였지만 드레퓌스 사건을 접하고 이를 공론화하는 「나는 고발한다」를 집필했던 그. 그 일을 기점으로 찬란했던 작가의 생은 험한 길로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는 “진실은 행진해오는 중이며 무엇도 그것을 막을 순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재작년인가 이 책으로 프레젠테이션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기도 했었는데, 단순히 PT를 떠나 깊은 인상을 받은 책이었다. 그 에밀 졸라의 무덤을 이곳에서 이렇게 우연히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무덤 앞에서 오래 앉아 있다가 묘지를 떠나왔다.

 


저녁에는 구엔과 마리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편안하고 신뢰하게 되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 1년간 머물다 돌아온 이후부터 여성들의 삶에 대해 책을 쓰고 있다는 구엔은 백인으로서, 남성으로서 자신의 워딩이 어떤 무지를 안고 있을지 몰라 두렵다고 말했다. 나는 히치하이킹을 하며 느꼈던 의심과 공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의 두려움은 나를 더 심각한 위험 속으로 빠지지 않게 도와주기에, 그의 고민과 두려움을 응원한다고 대답해주었다. 파전을 만들어 먹기도 했고 각종 프랑스 치즈와 와인을 먹어보기도 했다. 밤에는 산책을 나섰다. 눈이 내렸다. 파리의 12월, 첫눈, 밤거리. 와인 한 잔으로 한껏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밤이었다. 눈이 내리는 센 강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이는 작은 술집들, 카페들. 주먹만 한 쥐들이 발 근처를 돌아다녔지만 그것마저도 파리다웠다.

 

구엔은 자신이 좋아하는 맥줏집에서 맥주를 한 잔 사줬고,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주인공이 과거로 가는 차를 탔던 골목을 보여주었다. 나도 영화 속으로, 예술가들이 모여 잔을 부딪히는 그곳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하철을 타는 대신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구엔과의 파리 밤 산책. 모든 순간이 포근했다


걷는 와중에는 긴 이야기와 또 긴 침묵이 오갔다. 모든 순간이 포근했고 내일은 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먹먹했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기대하던 크리스마스 마켓도, 파리의 맑은 겨울도 볼 수 없었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사는 도시, 그들이 사랑하는 거리였기에.
 

파리 여행이 끝난 뒤 나는 스페인에서도 여러 번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스페인에서의 히치하이킹은 말이 통해서인지, 스킬이 생긴 건지 훨씬 안전했고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설렘은 똑같았다. 그렇게 가게 된 부르고스에서는 또다시 카우치 서핑을 하기도 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집 문을, 차 문을, 마음을 열어주는 사람들의 모습에 매번 감동하고 위로를 받았다.

 

나는 타인으로부터 위로를 찾는 나약한 존재임이 확실해졌지만 그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내가 나약하다는 사실이 그리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천차만별의 사람들을 만나며 내 안의 편견과 ‘올바른 삶’에 대한 정의를 지워나갔다. 다양한 삶의 아가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를 위로했다.

 

아무리 이상해 보이는 방식이라도 나는 숨 쉬고 있는 거라고. 숨을 쉰다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근사한 일이라고. 그러니 조금 이상해도 괜찮다고. 길 위에서 주워 담은 발자국들은 나를 계속해서 살아가게 할 것이다.

 

구엔과 마리는 후에 내가 아프다는 말에 스페인까지 한식을 보내주기도 했다.


[842호 - 네이버포스트x대학내일]

Writer Iris Lee yosul28@naver.com 
#842호#842호 대학내일#교환학생
댓글 0
닉네임
비슷한 기사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