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이게 결코 끝은 아니다

지옥이 인생의 마지막 모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재작년 봄, 호기롭게 휴학 신청을 하고 다이어리에 여행, 독서, 글쓰기 같은 것들이 포함된 ‘실행 목록’들을 빼곡히 적었다. 앞으로의 1년은 대학 생활 중 가장 행복한 한 해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때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고, 다이어리 가득 채웠던 계획들은 머지않아 쓰레기통에 들어가게 되었다.

휴학과 동시에, 3년간 과제와 아르바이트, 학점 관리로 혹사당하던 신체가 본격적으로 이상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해 여름, 더 떨어질 것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은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갔다. 면역 체계는 완전히 무너졌고, 호르몬 분비에도 이상이 생겼다. 팔다리가 퉁퉁 붓고 아려서 20분 이상 서 있기가 힘들었다. 한 달 사이에 체중은 6kg이상 불어났고 얼굴엔 여러 개의 수포가 생겼다.

호르몬 불균형이 야기한 우울과 무력감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놈의 ‘의지’와 ‘긍정’도 마비시켜버렸다.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한번 무너진 건강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장기간 이어지는 불행에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불면증과 같은 달갑지 않은 것들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내 인생 가장 지독하고 혹독한 여름이었다.

그 시기, 엄마의 친구를 비롯한 많은 어른들이 나를 찾아와 한마디씩 건넸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들이 겪은 ‘더 큰 불행’을 내게 들려주며 ‘감동 실화 극복 스토리’를 늘어놓았다. 여름의 절정기에 찾아온 그 손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쏟아지는 ‘불행 배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상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담이라면 이제 신물이 난다.


드디어 가야 할 때가 된 그녀는 가방을 챙기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어쨌든, 이게 결코 끝은 아니란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흘리듯 던진 그 한마디가 갑자기 귀에 걸렸다. 어쩐지, 그 한마디만은 마음에 남았다. 치료를 받은 지 6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내 몸은 아주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이듬해 봄, 아직 불안정하지만 나는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전히 병원에 다니며 학교생활을 했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사람들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던 내가, 다시 사람들과 회의를 하고 밥을 먹었다. 끔찍한 두통으로 책조차 읽기 힘들었는데, 전공 수업을 듣고 있었다. 다시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고, 건강 외의 다른 것들로 머릿속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행복하다’라는 문구가 마음속을 스쳤을 땐,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행복?, 방금 행복하다고 한 거야?’ 일 년 반 만에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조금 멍해졌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다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니. 이게 결코 끝은 아니라던 그 사람의 말이 맞았다. 여름날 겪었던 그 ‘지옥’은 내 삶의 마지막 모습이 아니었다. 영원히 그 자리 그 곳에 멈춰있을 것 같았던 내 시계는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다시’ 움직인다. “밟아도 밟아도 죽지만 말라. 또 다시 꽃피는 봄이 오리라.” 단편소설 「뿌리 없는 풀」의 한 구절이다.

누구에게나 내일은 해가 뜨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형벌’과도 같은 시기가 있다. 하루가 일 년 같고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져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분명 끝은 있다. 내 인생이 기어코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들어갔던 경험을 통해 말할 수 있다.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지금의 지옥이 절대 인생의 마지막 모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되지 않는다. 그러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지 않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을지언정, 죽지만 말라. 또 다시 꽃피는 봄이 반드시 오리니.

[852호 - 20's voice]

WRITER 김예란 yeran999@naver.com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공감을 얻는 글을 쓰고자 노력합니다  
#20's voice#20대 에세이#852호
댓글 0
닉네임
비슷한 기사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