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요즘 내가 듣는 유일한 칭찬 이겼닭! 치킨이닭!
우스꽝스러운 말 한마디에 성취감을 얻는다
이게 대체 무슨 해괴한 언어 파괴인가 싶겠지만, 먼바다 외딴섬 전투가 벌어지는 너른 들판 위, 최후의 승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칭찬이다. 쏟아지는 화염과 끊임없이 들리는 총성, 심장박동을 뛰게 하는 적들의 발소리.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극한의 공포.
오직 담대한 용기와 노력 그리고 신의 가호만이 이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 이것을 넘은 최후의 승리자에게는 “이겼닭! 치킨이닭!”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칭찬이 주어진다. “이겼닭! 치킨이닭!”은 요즘 수많은 불합격과 거절을 마주하고 있는 내게 주어진 유일한 축하이기도 하다.
배틀 그라운드는 100명의 플레이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그라운드에 떨어지면서 시작되는 게임이다. 모두가 똑같은 공정한 출발이다. 공정한 게임 세상에서 나는 원하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공정한 게임 속에서 나는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고, 용감하게 적과 맞서 싸우며 정직한 승리를 쟁취한다.
현실 속 나는 연거푸 채용에 탈락하는 취준생에 어두운 밤길을 두려워하며 공중화장실조차 마음대로 못 가는 여린 여자이지만, 게임 속 나는 적들을 용감히 물리치며 정직한 승리를 거두는 용맹한 전사다. 물론 게임에도 아이템 같은 운이 작용하며, ‘과금’이라는 경제적 요소가 승리 요건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러나 게임의 규칙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자발적 규칙이다. 자발적으로 성립된 규칙 안에서 우리가 얻어내야 할 성취는 대체로 공정하다. 비자발적인 규칙 속 수많은 부조리와 억압, 불합리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게임 밖 세상의 성취와 다르다. 쏟아져 나오는 채용 비리와 입시 비리, 재벌 3세의 갑질 같은 부조리가 게임 세상에는 없다.
그동안 학교와 사회는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성공 신화를 가르치며, 젊은이들에게 어른들이 건설한 사회의 경쟁 체제를 내면화하길 종용했다. 우리는 어른의 말을 듣고, 내게 주어진 상황과 차이를 극복 가능한 것이라 믿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을 쌓았다. 그러나 졸업 후 사회로 내던져진 우리가 목도한 실제 세상은 몹시 다르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취업난과 고공 행진하는 집값, 내 한 몸 편히 누일 곳 없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 뿐. 화려한 야경 아래 저 멀리 내 앞을 달려나가는, 체제의 선택을 받은 ‘금수저’ 자제만 도시의 불빛처럼 아른거린다. 또한, 게임은 실패해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설령 게임에서 죽는다 해도, 이어서 다른 게임을 시작하면 된다.
게임에서의 실패는 또 다른 기회다. 반면에 게임 밖 세상은 수많은 실패자를 양산할 뿐, 그들에게 쉽사리 기회를 주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한 번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부재하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 집과 생활비를 제공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사람, 실직 후 조그마한 ‘치킨집’이라도 낼 수 있는 사람만이 꿈꿀 수 있다.
게임 스트리머 ‘대도서관’은 한 게임 중독 토론회에서 청소년이 게임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이들에게 성취감을 주지 못하는 학교교육 때문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오직 게임 속 세상에서만 행복감을 느끼는 건 10대뿐만이 아니다.
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청년 세대도 끊임없는 좌절을 주는 현실 대신 게임 속에서 성취감과 행복을 얻는다. 월요일 아침 9시.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시간에도 우리 동네 PC방에는 늘 사람이 넘친다. 그들 대부분이 내 또래의 청년들이다.
한때는 현실을 뒤로하고 게임 속 세상에 몰두하는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봤었다. 그러나 끝없는 좌절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요즘, 나는 이제 그들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지친 하루를 달래기 위해 게임에 접속하며, “이겼닭! 치킨이닭!”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말 한마디에 성취감을 얻는다.
오직 담대한 용기와 노력 그리고 신의 가호만이 이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 이것을 넘은 최후의 승리자에게는 “이겼닭! 치킨이닭!”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칭찬이 주어진다. “이겼닭! 치킨이닭!”은 요즘 수많은 불합격과 거절을 마주하고 있는 내게 주어진 유일한 축하이기도 하다.
배틀 그라운드는 100명의 플레이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그라운드에 떨어지면서 시작되는 게임이다. 모두가 똑같은 공정한 출발이다. 공정한 게임 세상에서 나는 원하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공정한 게임 속에서 나는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고, 용감하게 적과 맞서 싸우며 정직한 승리를 쟁취한다.
현실 속 나는 연거푸 채용에 탈락하는 취준생에 어두운 밤길을 두려워하며 공중화장실조차 마음대로 못 가는 여린 여자이지만, 게임 속 나는 적들을 용감히 물리치며 정직한 승리를 거두는 용맹한 전사다. 물론 게임에도 아이템 같은 운이 작용하며, ‘과금’이라는 경제적 요소가 승리 요건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러나 게임의 규칙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자발적 규칙이다. 자발적으로 성립된 규칙 안에서 우리가 얻어내야 할 성취는 대체로 공정하다. 비자발적인 규칙 속 수많은 부조리와 억압, 불합리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게임 밖 세상의 성취와 다르다. 쏟아져 나오는 채용 비리와 입시 비리, 재벌 3세의 갑질 같은 부조리가 게임 세상에는 없다.
그동안 학교와 사회는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성공 신화를 가르치며, 젊은이들에게 어른들이 건설한 사회의 경쟁 체제를 내면화하길 종용했다. 우리는 어른의 말을 듣고, 내게 주어진 상황과 차이를 극복 가능한 것이라 믿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을 쌓았다. 그러나 졸업 후 사회로 내던져진 우리가 목도한 실제 세상은 몹시 다르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취업난과 고공 행진하는 집값, 내 한 몸 편히 누일 곳 없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 뿐. 화려한 야경 아래 저 멀리 내 앞을 달려나가는, 체제의 선택을 받은 ‘금수저’ 자제만 도시의 불빛처럼 아른거린다. 또한, 게임은 실패해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설령 게임에서 죽는다 해도, 이어서 다른 게임을 시작하면 된다.
게임에서의 실패는 또 다른 기회다. 반면에 게임 밖 세상은 수많은 실패자를 양산할 뿐, 그들에게 쉽사리 기회를 주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한 번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부재하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 집과 생활비를 제공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사람, 실직 후 조그마한 ‘치킨집’이라도 낼 수 있는 사람만이 꿈꿀 수 있다.
게임 스트리머 ‘대도서관’은 한 게임 중독 토론회에서 청소년이 게임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이들에게 성취감을 주지 못하는 학교교육 때문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오직 게임 속 세상에서만 행복감을 느끼는 건 10대뿐만이 아니다.
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청년 세대도 끊임없는 좌절을 주는 현실 대신 게임 속에서 성취감과 행복을 얻는다. 월요일 아침 9시.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시간에도 우리 동네 PC방에는 늘 사람이 넘친다. 그들 대부분이 내 또래의 청년들이다.
한때는 현실을 뒤로하고 게임 속 세상에 몰두하는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봤었다. 그러나 끝없는 좌절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요즘, 나는 이제 그들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지친 하루를 달래기 위해 게임에 접속하며, “이겼닭! 치킨이닭!”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말 한마디에 성취감을 얻는다.
[858호 - 20's voice]
writer 안유리 joint93@naver.com 수십 번 쓴 자소설 만큼이나 지금의 자기소개가 어려운 배린이
#20대 고민#20대 에세이#20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