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오늘도 서울살이가 고달팠던 누군가에게
고달픈 20대를 위로하는 컬처레터 3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도 서울살이가 고달팠던 누군가에게
Picture book 고사리 가방
김성라 / 12,500원


서울에 오래 있으면 마음의 물컵이 점점 비어가는 기분이 든다. 물이 바닥이 보일 때면 그래서 숲이나 강이나 바다 같은, 물기 어린 것들을 보러 간다. 고향에도 간다. 내가 떠나온 곳, 이젠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어딘가 멀어진 듯한 기분이 드는 곳에. 김성라 작가가 그리고 쓴 『고사리 가방』은 그렇게 자주 바닥나곤 하는 마음에 서서히 물이 차오르게 하는 책이다. 고향을 떠나오고 엄마를 떠나온 사람이라면 더욱 오래 들여다보게 될. 이제는 ‘집’에 가면서 여행을 떠나듯 짐을 꾸려야 하는 우리. 버스나 기차를 타고서야 닿을 수 있는 고향. 그곳에서 해가 높이 뜰 때까지 늦잠을 자다 잠자러 왔느냐는 타박을 듣고, 내가 떠나온 풍경을 새삼스레 들여다보고, 다시 타박타박 서울로 돌아오곤 하는 모두에게 말을 거는 이야기.
책 속에서 빵실한 단발머리를 한 주인공은 매년 4월 벚꽃이 필 무렵이면, 엄마의 바람길에 친구가 되려 고향 제주에 간다. 어딘가 귀엽고 다정하게 들리는 제줏말도, 새벽같이 버스를 타고 고사리를 찾아 떠나는 제주 사람들도 귀엽지만 무엇보다 이 책을 따뜻하게 만드는 건 그 모든 것을 조곤조곤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빈 새둥지와 제비꽃을, 버스 너머로 바다가 나타나는 순간을, 엄마의 눈매와 입매가 변하며 만드는 표정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거겠지. 그 곁을 따라 걷는 동안 비로소 내가 못 보고 지나친 것들을 함께 볼 수 있었다. 여름 동안 나도 고향집에 다녀왔다. 날도 더운데 자꾸 옥상에 가서 맥주라도 마시라는 아빠의 부추김에 왜 그러나 했더니 새로 꾸며놓은 옥상을 자랑하고 싶었던가 보다. 어디를 둘러 봐도 짙푸른 산이 보이는 너른 옥상에 잘 닦아놓은 평상이 놓여 있었다. 거기 누워 비스듬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 우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고향에 살 때 나는 이곳에 없는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멀어진 지금은, 그곳에만 있는 것들이 보인다. 산의 능선 위로 해가 지는 풍경, 사계절이 선명히 짙어졌다 사라지는 들판, 그곳에서 이어지는 내 부모의 삶… 그런 것들이.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 고사리처럼 발밑에 있을 땐 잘 안 보이지만 조금 걷고 나서 돌아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그래서 그을린 얼굴로 서울에 돌아왔을 때, 이 책을 누구에게든 건네고 싶어졌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엔 나와 같은 마음이 되고 말,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된 나의 친구들에게. 김신지
우정이 어려운 사람에게
Short story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 13,500원

왜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인생에서 사라진 이들을 찾을까. 물론 내게도 취하면 보고 싶은 이들이 있다. 그중 반절 이상은 별일도 없이 멀어져 남이 된 옛 친구들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한 친구와도 큰 싸움 없이 연락이 끊겼다. 한참 잊고 살았는데 얼마 전에 엄마가 “너 K랑은 이제 안 만나냐? 결혼한 것 같던데.”라고 물었다. 괜히 머쓱해서 못 들은 척하고 있었더니, 뼈 있는 말을 툭 던지곤 전화를 끊으셨다.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친구랑 싸워. 사이좋게 지내 늙어서 친구 없으면 외롭다.” 그러게 엄마. 나는 친구가 왜 이렇게 어렵냐.
그런데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우정이란 원래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최은영의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도 맹목적인 애정을 쏟다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받은 뒤 헤어진 관계가 여러쌍 등장한다. 수록작 「모래로 지은 집」은 나비, 모래, 공무, 세 사람이 틔운 우정의 싹이 자라고 시드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넉넉한 가정에서 자란 모래의 다정함과 여유로움은 형편이 어려운 나비에게 상처가 돼고, 나비의 방어적인 태도는 모래에게 배신감을 안긴다. 소설이 보여주는 우정의 끝은 현실 속 우리와 다른 듯 닮아 있어서 책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가 우정을 오해하고 있던 건 아닐까? 일단 친구가 되고 나면 저절로 지속될 거라고. 사실 우정은 사랑만큼이나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을 텐데. 김혜원
긍정의 무게가 버거운 이들에게
Netflix Original 빨간머리 앤2
원제: Anne with an ‘E’ / 출연: 에이미베스 맥널티, 제럴딘 제임스 등

2018년의 나는 완연한 지구인이 되어 있다. 친구들만 만나면 봇물 터지듯 답 없는 고민과 근심을 대방출한다. 부정적인 기운을 마구 내뿜는데도 친구들은 그 옛날 걱정했던 것처럼 나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토닥여주고 위로랍시고 시시한 농담도 건네준다. 내 그늘을 보여줬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이 사실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긍정을 짊어지고 괜찮은 척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이 평범한 진리는 넷플릭스 시리즈 <빨간 머리 앤2>의 앤에게도 적용된다. 화면 속엔 어린 시절 책에서 봤던 밝고 낙천적이기만 한 앤 대신 고아원에서 겪은 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앤이 등장한다. 생각해보면 파양의 아픔까지 겪은 앤이 마냥 밝을 리 없는데…. 원작인 책 속의 앤도 때론 스무 살의 나처럼 긍정의 무게가 버겁지 않았을까. 혹자는 우울해진 앤을 보고 #notmyanne이라는 해시태그까지 달아 불만을 표했다지만 나는 외계인 같지 않은, 현실에 발붙인 넷플릭스 표 앤도 충분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서재경
[859호 - culture letter]
#고사리 가방#내게 무해한 사람#빨간 머리 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