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오늘도 기분에 상관없이 싹싹해야 했나요?

비슷한 고충을 겪는 영화 속 캐릭터

<오, 여정: 봄> 

출연: 이소희 / 72초 TV 

     
“혹시… 졸리세요…?”
“안 좋은 일 있으신 거 아니죠?”
“차분하시네요… 좀 우울한 것 같기도 하고….” 

이 예의 바른 디스들은 내가 지금까지 면접에서 들었던 말들이다. 내 느릿한 말투, 높낮이 없는 목소리, 멍한 표정 때문이다. 녹음기 틀어 놓은 것 같다는 소리도 들은 적 있으니 말 다했다.  

“저 기분 되게 좋습니다!”라고 해봤자 한껏 낮은 도의 음정은 숨길 수 없었다. 내 사회성… 내 긍정 에너지… 너무 작아서 귀여워.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면접을 보는 다른 지원자들을 보며 배알이 살포시 뒤틀리던 날들이었다.  

72초 TV <오, 여정: 봄>의 주인공 ‘여정’도 비슷한 이유로 고충을 겪는다. 회사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꾸 겉돌기만 한다. 회식 자리에서 누가 갑자기 삼행시라도 시키면 재치 있게 답하지도, 웃어 넘기지도 못해 갑분싸가 되고 만다. 여정은 이 때문에 혼자 있을 때 삼행시를 연습해보는 짠한 습관까지 생긴다.  

눈치를 보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뒷걸음 치고, 한숨 쉬고, 숨고, 질질 짜는 날들. 그런 날들은 차진 찰떡 같아서 목구멍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여정은 퇴사를 한다. 혼자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여정은 경주로 간다. 혼자 가는 여행이 그렇듯 주로 별일이 없다. 걷고 먹고 자기의 반복. 똥꼬발랄한 브금을 깐 청춘 드라마 같은 즐거움은 없다. 누군가와 얘기할 때도 까르륵 꺅 물개 박수를 칠 만큼 재미있지 않다.
 

느린 대관람차처럼 시간과 공간이 조금씩 이동할 뿐이다. 영상 내내 이어지는 여정의 ASMR급 기력 없는 내레이션도 축 처진 분위기를 더한다. 덩달아 나른해져서 영상을 보고 있는데 어쩐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웃을 일이 없는데도 좋아 보였다. 웃을 ‘일’이 없어서 좋아 보였다. 우리는 면접에서든 어디서든 웃어야 한다.

  특히 ‘젊고 파릇한’ 20대라면 언제나 조금 들떠 있고 인생 신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필요 이상으로 웃고,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기분에 상관없이 싹싹해서 “허헛, 이 친구 사람 참 좋네” 하는 말을 감사히 들어야 하는 날들. 웃는 건 일이다. 내 소듕한 안면 근육과 들숨, 날숨, 특히 감정을 써야 하는 일. 당연히 내 생사의 멱살을 잡고 요리조리 흔드는 면접관 같은 사람 앞에선 엄청나게, 일이다.  

그런 거라면 나는 아예 일로만 받아들이고 싶다. 공과 사 구분해서 깔끔하게 비즈니스로만.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할까, 왜 사냐 증말’ 하는 자괴감까지 연결 짓지 말고. 스스로에게 웃지 않을 자유도 주면서. 물론 나도 면접을 보게 된다면 웃어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잘 안 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난 좋은 사람이니까, 사람 좋아 보이는 건 좀 못 해도 상관없겠지.
 

[860호 - culture letter]

Writer 빵떡씨 instagram @choihj906
#오여정#영화#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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