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바보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 너에게
아직까지 '노력'이란 단어에 미련을 갖는 이들에게
1. 얼마 전 후배 A가 꼬부라진 혀로 전화를 걸어 왔다. “선배, 저는 지나ㅉ 바보 갛튼 것 가탕요.” 응? 바보 같다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 자세를 가다듬고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초당 세 번씩 진동하는 성대의 떨림, 막 울음을 그친 듯 젖어 있는 목소리. 아아, 결국 그렇게 된 건가. 얼마 전 애인과 헤어졌다더니 그새를 못 참고 <자니?>를 시전한 게 틀림없다. 쯧쯧. 이제 와 무얼 어쩌나.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인걸.
“괜찮아 인마. 너 고양이 키우지? 걔가 했다 그래.”
“…아니 선배 그게 아ㅣㄴ라..”
겨우 한 자 한 자 내뱉는 후배의 단어들을 조립해 보니 상황은 대충 이랬다. 오랜만에 동기들과 모여 근황 토크를 시작했는데, 너도나도 탈스펙이니 욜로니 대충살자 시리즈 봤냐느니 야단이더란다. 가만 듣던 후배 녀석이 “그래도 미래를 대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삶이 좋지 않을까?” 조심스레 운을 뗀 순간 찾아온 정적. 그나마 재치 있는 동기 하나가 “오~ 갑자기 분위기 노력?!” 하며 위트로 받아쳐 준 덕에 어찌어찌 분위기는 회복됐지만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갑분노’로 놀림을 받았다는 것.
동기들은 우스갯소리로 놀린 모양이지만 후배의 충격은 커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후배는 열정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표본이었다. 쉬어서 뭐하냐며 전역하자마자 소일거리를 찾아 헤매던 녀석. 대학 졸업장만 가지고는 어림없다며 각종 대외활동, 자격증, 인턴 등 하루도 쉬지않고 열중이던 녀석. 사람 좋은 표정으로 “노력하면 언젠가 나아지겠죠 뭘.”을 입에 달고 다니던, 음. 유노윤호의 보급형쯤 되려나.
자신의 노력이 노오오오오오오력으로 치부되어 조롱거리로 나뒹구는 시류가 온라인의 허상이 아닌 오프라인의 실체란 현실을 깨달았을 때 느꼈을 당혹감의 크기를,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그래 속상했겠다, 취했으니 일단 들어가자. 혀 위에 맴돌던 시답잖은 위로의 문장들을 겨우 억누르고 어물쩍 통화를 마쳤다. 수화기 너머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나, 참 바보 같죠?”라는 후배의 물음은 머릿속에 여전히 맴돌았다.
노력은 언제부턴가 금기어처럼 나뒹구는 단어가 됐다
2. 말마따나 ‘열심’이란 단어에 ‘하마터면’이 수식되는 세상이다. 그 수식은 서점 베스트셀러 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요즘 누가 바보처럼 열심이겠나. YOLO는 너무나도 당연해서 촌스럽기까지 하다. 휘게 라이프. 탈스펙. 그럼그럼. 아무렴 노오오력이 무슨 소용 있겠어. 여유롭게 행복하게. 보노보노처럼 살아야 다행이지. 꿈과 목표 따위, 없어도 그만. 누워서 폰만 만지작거리는 너의 일상, 괜찮단다. 걱정 말고 게으르렴.
하루를 마치고 이불에 누워 폰을 들여다보면 이렇듯 달콤한 위로들이 귓등에 발린다. 미디어에선 각자의 위치에서 성취를 일구어낸 셀럽들이 너도나도 한목소리로 외친다. 굳이 노력할 필요 없다고, 힘든 현실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라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도 얼마든지 괜찮다고.
위로가 위로에서 그치면 좋으련만. 이런 위로는 종종 폭력으로 변모한다. ‘유별난 애’ ‘쓸데없이 힘 쏟는 애’ ‘오글 거리는 애’ ‘(어차피 안 될거)바보처럼 노력하는 애’ 대충 살아야 똑똑한 세상에서 노력하는 이들에게 찍히는 낙인의 종류다. 후배가 술자리에서 들은 ‘갑분노’ 사건은 비단 단편적인 해프닝이 아니리라. 실제로 많은 이들이 주변에서 오늘도 후려치기 당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그 피해자는 주로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일구어 나가는 대학생들. 성공적인 PPT 발표를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팀원에게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세요?”라며 핀잔을 준다. 자소서 문장 하나에 두 시간 째 매달려 있는 동기에게 “그냥 대충 써서 내”라며 충고를 한다. 좋은 성적을 목표로 도서관에서 밤을 지새울 채비를 마친 후배에게 “그래 봤자 취업 안 돼”라며 자신이 달관한 삶을 조언 한다.
대외활동 지원서에 일주일 째 매달려 있는 대학생 B. 그는 자신의 노력이 온전한 결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과연 모를까. 모르기 때문에 바보처럼 매달려 있는 걸까. 대외활동 따위 결국 소용 없더라는 따금한 조언으로 그를 ‘우리의 현실’로 인도하는 일이 과연 옳은가.
사실 이 책도 '열심히' 쓰이지 않았을까. 작가의 모순을 비판하는 건 아니다. 그저 노력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것이라 추측되는) 작가의 의도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오독되어 합리화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 3.열심히 살 필요 없다는 말로 상대의 노력을 폄훼하는 이들이 알아야 할, 냉정하고 차가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러한 류의 위로는 ‘꿈과 목표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의 부담을 덜어내 주기 위한 것이지, ‘아무 꿈과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합리화 수단이 아니라는 것. 이런 말들을 무기로 쥐어 열심인 이들에게 휘두르다니.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글의 타깃은 어디까지나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 이다. 너무나도 열심인 탓에 일상의 행복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잃은 사람들. 스스로가 부여한 심리적 압박으로 어둡게 침잠하는 이들. 노력의 배신에 끔찍한 좌절감을 겪고 있는 이들. 이런 이들에게 너무 성취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위로, 소소한 행복에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위로를 건네 중간을 찾도록 도와주는 말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누군가가 이런 위로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 그리고 그것을 무기로 삼아 휘두르면 안 되는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다. 필요가 없으니까. 찌개가 너무 짜다면 넣으라고 주어진 물을 안 그래도 맹탕인 고깃국에 넣으면 안 되는 이치와 다름없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의 삶의 모토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자’라고 한다. 그 모토는 ‘아주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마찬가지다. “너무 노력할 필요는 없어.” 라는 위로를 건넬 자격은 ‘너무 노력하는(했던)’ 사람에게 있다. 아무 노력 하지 않는 이가 노력하는 이에게 충고할 자격 따위, 누구도 부여한 적 없다.
"해봤자 안 될 거야" 와 "해 봤더니 안 되더라"의 차이가 갖는 의미. 4. 마지막으로 ‘대충 살자’식의 염세적인 시류 속에서도 꿋꿋하게 노력하고 있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빈 강의실에서 막 나와 이 글을 마주한 너에게, 도서관 책상에 앉아 페북을 켠 너에게, PPT와 씨름하다 잠깐 담배를 태우러 나온 너에게, 대외활동 미션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폰을 쥐고 있는 너에게. 사실 이 글은 오늘날 ‘노력충’으로 깎아내려 져 바보로 취급받는 이들을 위로하고자 시작했다.
분명 해주고 싶은 위로가 있었다. 많았다. 헌데 글을 쓰며 부러 잊었다. 연필 한 자루 세상에 내놓는 것도 아닌, 알량한 손가락으로 자판이나 두들겨 글이나 뱉어내는 글쟁이 주제에. 바보 소리를 들으며 까지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히 어떤 위로를 건네랴. 싶은 생각이 문장을 거듭할수록 강해졌다.
그럼에도 한 마디. 의견이 아닌 ‘분명한 사실’을 전하자면. 노력은 언제나 기대했던 결과로 돌아오진 않지만, ‘노력했던 자신의 모습’ 그 자체가 이미 충분한 결과라는 것. ‘노력했던 모습’이라는 결과가 겹겹이 쌓이던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자신의 모습을 볼 날이 오지 않을까. 오늘도 열심인 바보들에게, 그 바보스러움을 응원한다.
“괜찮아 인마. 너 고양이 키우지? 걔가 했다 그래.”
“…아니 선배 그게 아ㅣㄴ라..”
겨우 한 자 한 자 내뱉는 후배의 단어들을 조립해 보니 상황은 대충 이랬다. 오랜만에 동기들과 모여 근황 토크를 시작했는데, 너도나도 탈스펙이니 욜로니 대충살자 시리즈 봤냐느니 야단이더란다. 가만 듣던 후배 녀석이 “그래도 미래를 대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삶이 좋지 않을까?” 조심스레 운을 뗀 순간 찾아온 정적. 그나마 재치 있는 동기 하나가 “오~ 갑자기 분위기 노력?!” 하며 위트로 받아쳐 준 덕에 어찌어찌 분위기는 회복됐지만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갑분노’로 놀림을 받았다는 것.
동기들은 우스갯소리로 놀린 모양이지만 후배의 충격은 커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후배는 열정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표본이었다. 쉬어서 뭐하냐며 전역하자마자 소일거리를 찾아 헤매던 녀석. 대학 졸업장만 가지고는 어림없다며 각종 대외활동, 자격증, 인턴 등 하루도 쉬지않고 열중이던 녀석. 사람 좋은 표정으로 “노력하면 언젠가 나아지겠죠 뭘.”을 입에 달고 다니던, 음. 유노윤호의 보급형쯤 되려나.
자신의 노력이 노오오오오오오력으로 치부되어 조롱거리로 나뒹구는 시류가 온라인의 허상이 아닌 오프라인의 실체란 현실을 깨달았을 때 느꼈을 당혹감의 크기를,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그래 속상했겠다, 취했으니 일단 들어가자. 혀 위에 맴돌던 시답잖은 위로의 문장들을 겨우 억누르고 어물쩍 통화를 마쳤다. 수화기 너머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나, 참 바보 같죠?”라는 후배의 물음은 머릿속에 여전히 맴돌았다.

2. 말마따나 ‘열심’이란 단어에 ‘하마터면’이 수식되는 세상이다. 그 수식은 서점 베스트셀러 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요즘 누가 바보처럼 열심이겠나. YOLO는 너무나도 당연해서 촌스럽기까지 하다. 휘게 라이프. 탈스펙. 그럼그럼. 아무렴 노오오력이 무슨 소용 있겠어. 여유롭게 행복하게. 보노보노처럼 살아야 다행이지. 꿈과 목표 따위, 없어도 그만. 누워서 폰만 만지작거리는 너의 일상, 괜찮단다. 걱정 말고 게으르렴.
하루를 마치고 이불에 누워 폰을 들여다보면 이렇듯 달콤한 위로들이 귓등에 발린다. 미디어에선 각자의 위치에서 성취를 일구어낸 셀럽들이 너도나도 한목소리로 외친다. 굳이 노력할 필요 없다고, 힘든 현실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라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도 얼마든지 괜찮다고.
위로가 위로에서 그치면 좋으련만. 이런 위로는 종종 폭력으로 변모한다. ‘유별난 애’ ‘쓸데없이 힘 쏟는 애’ ‘오글 거리는 애’ ‘(어차피 안 될거)바보처럼 노력하는 애’ 대충 살아야 똑똑한 세상에서 노력하는 이들에게 찍히는 낙인의 종류다. 후배가 술자리에서 들은 ‘갑분노’ 사건은 비단 단편적인 해프닝이 아니리라. 실제로 많은 이들이 주변에서 오늘도 후려치기 당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그 피해자는 주로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일구어 나가는 대학생들. 성공적인 PPT 발표를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팀원에게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세요?”라며 핀잔을 준다. 자소서 문장 하나에 두 시간 째 매달려 있는 동기에게 “그냥 대충 써서 내”라며 충고를 한다. 좋은 성적을 목표로 도서관에서 밤을 지새울 채비를 마친 후배에게 “그래 봤자 취업 안 돼”라며 자신이 달관한 삶을 조언 한다.
대외활동 지원서에 일주일 째 매달려 있는 대학생 B. 그는 자신의 노력이 온전한 결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과연 모를까. 모르기 때문에 바보처럼 매달려 있는 걸까. 대외활동 따위 결국 소용 없더라는 따금한 조언으로 그를 ‘우리의 현실’로 인도하는 일이 과연 옳은가.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글의 타깃은 어디까지나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 이다. 너무나도 열심인 탓에 일상의 행복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잃은 사람들. 스스로가 부여한 심리적 압박으로 어둡게 침잠하는 이들. 노력의 배신에 끔찍한 좌절감을 겪고 있는 이들. 이런 이들에게 너무 성취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위로, 소소한 행복에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위로를 건네 중간을 찾도록 도와주는 말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누군가가 이런 위로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 그리고 그것을 무기로 삼아 휘두르면 안 되는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다. 필요가 없으니까. 찌개가 너무 짜다면 넣으라고 주어진 물을 안 그래도 맹탕인 고깃국에 넣으면 안 되는 이치와 다름없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의 삶의 모토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자’라고 한다. 그 모토는 ‘아주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마찬가지다. “너무 노력할 필요는 없어.” 라는 위로를 건넬 자격은 ‘너무 노력하는(했던)’ 사람에게 있다. 아무 노력 하지 않는 이가 노력하는 이에게 충고할 자격 따위, 누구도 부여한 적 없다.

분명 해주고 싶은 위로가 있었다. 많았다. 헌데 글을 쓰며 부러 잊었다. 연필 한 자루 세상에 내놓는 것도 아닌, 알량한 손가락으로 자판이나 두들겨 글이나 뱉어내는 글쟁이 주제에. 바보 소리를 들으며 까지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히 어떤 위로를 건네랴. 싶은 생각이 문장을 거듭할수록 강해졌다.
그럼에도 한 마디. 의견이 아닌 ‘분명한 사실’을 전하자면. 노력은 언제나 기대했던 결과로 돌아오진 않지만, ‘노력했던 자신의 모습’ 그 자체가 이미 충분한 결과라는 것. ‘노력했던 모습’이라는 결과가 겹겹이 쌓이던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자신의 모습을 볼 날이 오지 않을까. 오늘도 열심인 바보들에게, 그 바보스러움을 응원한다.
#20대#고민#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