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너의 생일을 축하해도 될까?
생일 알림 서비스는 나의 인간관계를 점검하게 만든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쯤은 복도에서 울려 퍼지던 시끄러운 노랫소리. 주인공인 친구가 창피해하라고 화음까지 넣어가며 다 같이 목청껏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생일 축하의 묘미였다. 가끔 챙기기가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축하받는 이뿐만 아니라 축하하는 이도 즐길 수 있었던 소소한 이벤트가 바로 누군가의 ‘생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면서 넓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다 보니 맞이하는 생일이 더 많아졌다. 친절한 카카오톡은 ‘오늘 생일인 친구’라는 강제 알림 서비스를 제공해주는데, 그때마다 새삼 나의 인간관계를 점검하게 된다. ‘카톡만 보내면 민망한 사이?’ ‘그렇다고 기프티콘을 보내기엔 좀 어색한 사이…?’ 하는 식으로.
생일날 축하 선물을 많이 받은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안 친한 사람한테 받은 음료 기프티콘은 솔직히 부담스러워. 이게 다 나중에 빚이 되는 거잖아.” 되갚을 생각에 오히려 부담이 크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고민은 더 깊어졌다. 챙길 것인가, 말 것인가. 결국 그 기준을 정하기도 모호하고 괜히 생각만 복잡해져서 아예 생일을 안 챙기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내가 생일을 챙기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생일을 알게 되는 사람은 많아지지만, 정작 챙기지는 않게 되는 아이러니. 물론 이런 상황이 편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론 ‘너 되게 외롭게 지내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기준 같은 거 필요 없을 만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생일을 챙길 친구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친하’거나 일상에서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저 각자의 일로 바쁜 탓도 있겠지만, 요즘 같은 개인주의 시대에는 ‘존중’이라는 명목하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다 보니 상대의 영역에 개입하는 것도, 개인의 영역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서로가 필요할 때만 만날 수 있고 ‘친밀함’을 얻기란 어려운 것, 혹은 친밀함을 바란다는 게 사치가 되었다. 가벼운 일상도 TMI가 되어버리는 시대에 나의 깊은 고민거리는 상대에게 짐이 되어 되레 피해를 주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모든 부담과 책임을 온전히 홀로 지며 뭐든 스스로 하려는 습성이 늘었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도, 주는 일도 줄었다. 나는 이 세상을 혼자 살고 있었다. ‘혼자서도 해낼 수 있어, 피해 주지 말자’라는 생각에서 시작했지만 나를 도와주겠다고 옆에 있어 주는 타인의 존재 가치를, 때론 타인을 위한 나의 가치까지 지워버리게 된 것이다.
주변 많은 사람들의 생일이 그냥 지나간다. 애매한 관계를 가늠하다 지나쳐버린 생일들에 마음이 공허해질 때쯤, 고등학교 때부터 쭉 같이 지내왔던 친한 친구의 생일이 돌아왔다. 얘만큼은 내가 마음 놓고 성심껏 챙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얼마를 써서 챙기든 부담을 갖지 않고 그냥 축하의 의미로 고맙게 받아줄 친구였다. 내 고민을 덜어주려는 듯 친구는 아예 특정 선물을 골라 사달라고 했고, 그녀의 당당함이 ‘넌 내 곁에 있는, 기꺼이 챙김 받고 싶은 친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복잡한 관계망 사이에서 잠깐 지워졌던 나의 존재가 조금은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편지를 쓰고 선물을 포장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시작됐지만, 기분은 좋았다. 반 십년지기 친구에게 오랜만에 정말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내가 생일을 마음껏 축하할 수 있는 친구로 남아줘서 고마워, 생일 축하해.”
Writer 최윤솔 yunsol0101@gmail.com맘껏 축하하며 살고 싶은 어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면서 넓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다 보니 맞이하는 생일이 더 많아졌다. 친절한 카카오톡은 ‘오늘 생일인 친구’라는 강제 알림 서비스를 제공해주는데, 그때마다 새삼 나의 인간관계를 점검하게 된다. ‘카톡만 보내면 민망한 사이?’ ‘그렇다고 기프티콘을 보내기엔 좀 어색한 사이…?’ 하는 식으로.
생일날 축하 선물을 많이 받은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안 친한 사람한테 받은 음료 기프티콘은 솔직히 부담스러워. 이게 다 나중에 빚이 되는 거잖아.” 되갚을 생각에 오히려 부담이 크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고민은 더 깊어졌다. 챙길 것인가, 말 것인가. 결국 그 기준을 정하기도 모호하고 괜히 생각만 복잡해져서 아예 생일을 안 챙기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내가 생일을 챙기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생일을 알게 되는 사람은 많아지지만, 정작 챙기지는 않게 되는 아이러니. 물론 이런 상황이 편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론 ‘너 되게 외롭게 지내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기준 같은 거 필요 없을 만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생일을 챙길 친구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친하’거나 일상에서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저 각자의 일로 바쁜 탓도 있겠지만, 요즘 같은 개인주의 시대에는 ‘존중’이라는 명목하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다 보니 상대의 영역에 개입하는 것도, 개인의 영역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서로가 필요할 때만 만날 수 있고 ‘친밀함’을 얻기란 어려운 것, 혹은 친밀함을 바란다는 게 사치가 되었다. 가벼운 일상도 TMI가 되어버리는 시대에 나의 깊은 고민거리는 상대에게 짐이 되어 되레 피해를 주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모든 부담과 책임을 온전히 홀로 지며 뭐든 스스로 하려는 습성이 늘었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도, 주는 일도 줄었다. 나는 이 세상을 혼자 살고 있었다. ‘혼자서도 해낼 수 있어, 피해 주지 말자’라는 생각에서 시작했지만 나를 도와주겠다고 옆에 있어 주는 타인의 존재 가치를, 때론 타인을 위한 나의 가치까지 지워버리게 된 것이다.
주변 많은 사람들의 생일이 그냥 지나간다. 애매한 관계를 가늠하다 지나쳐버린 생일들에 마음이 공허해질 때쯤, 고등학교 때부터 쭉 같이 지내왔던 친한 친구의 생일이 돌아왔다. 얘만큼은 내가 마음 놓고 성심껏 챙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얼마를 써서 챙기든 부담을 갖지 않고 그냥 축하의 의미로 고맙게 받아줄 친구였다. 내 고민을 덜어주려는 듯 친구는 아예 특정 선물을 골라 사달라고 했고, 그녀의 당당함이 ‘넌 내 곁에 있는, 기꺼이 챙김 받고 싶은 친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복잡한 관계망 사이에서 잠깐 지워졌던 나의 존재가 조금은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편지를 쓰고 선물을 포장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시작됐지만, 기분은 좋았다. 반 십년지기 친구에게 오랜만에 정말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내가 생일을 마음껏 축하할 수 있는 친구로 남아줘서 고마워, 생일 축하해.”
Writer 최윤솔 yunsol0101@gmail.com맘껏 축하하며 살고 싶은 어른이
[874호 - 20's voice]
"20대가 살아가는 진짜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글 쓰는 20대> 카테고리에서 에세이를 작성해주세요"
#생일#생일 축하#인간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