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너는 하면 잘 할 거야' 라는 족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마법의 문장

#1 어린 시절부터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달고 살았다. 주 비교 대상은 두 살 터울의 누나.  

"상구(슬프게도 본명) 저 자식은 머리가 좋으니 뭐든 하기만 하면 잘 할 거야."
"xx(누나)이는... 그래, 우리 xx이는 열심히 노력하는 스타일이니까!"
   

정말로 그랬다. IQ테스트를 비롯한 각종 지능 검사는 부모님의 칭찬이 허튼 소리가 아님을 증명했다. 구몬 선생님이 내 준 문제를 10분만에 해치우고 뛰쳐나가 롤러 브레이드를 타고 놀던 내 모습과 30분 넘게 끙끙거리며 매달리는 누나 모습이 주는 대비 또한 낮밤처럼 극명했으니까. (머리는 별로지만) 성실한 누나와 똑똑한 동생. 부모님에게 우리는 나름 밸런스가 잡혀 있는 안정적인 남매였으려나.  

그로부터 약 20년이 흐른 지금. 어떻게 되었냐고? 두뇌 회전이 느린 가여운 누나는 고작 명문대에 합격한 후 남들 두 세 번씩 떨어진다는 무시무시한 시험을 슬프게도 한 번에 통과, 고소득 전문직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반면 고지능의 영특한 나는? 수능을 복습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린 후(재수 했단 소리다.) 서울 변두리 4년제 대학을 3점 초반대 학점으로 느긋하게 졸업(늦게 졸업했단 소리다.), 1년 정도 미래의 큰 그림을 느긋하게 그리다(백수였단 소리다.) 어느 관대하신 고용주의 아량으로 이렇게 글이나 끼적이는 안빈낙도의 평화로운 삶을… 그래, 누나는 성공했고 나는 망(할뻔)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돼 있었다. 누나는 어느새 자신만의 결과를 일군 엘리트로 변해 있었고, 나는 누나의 결과에 기생해 고시원에 쳐박혀 졸업도 미루고 하릴없이 공부(하는 시늉이)나 하고 있는 신세가 돼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내가 무엇이든 더 ‘잘’ 했어야 했는데? 공부든 시험이든, 머리를 쓰는 일은 똑똑한 내가 더 잘 했어야 했다. 누구나 그렇게 말 했으니까. 모두가.  

장판에 물든 진갈색 커피 얼룩 위로 파리가 위윙 거리던 어느 여름날. 고시원 한 켠 구석에 누워 3일째 갈아 입지 않은 파란 사각팬티 사이에 선풍기 바람이 시원하게 통하는 걸 느끼며 기억을 더듬었다. 도대체가 어디서부터 매듭이 꼬였던 것인지.    

#2  중 3때쯤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척하면 척’이었던 내용들이 ‘척 해도 어?’ 로 변했던 시기 말이다. 대충 개요만 눈으로 훑어도 머리를 향해 쏙쏙 돌진하던 수학 개념들이 삼각함수의 등장과 함께 바위처럼 우뚝 멈춰 섰다. 탄젠트? 코사인? 삼각형을 이리 돌리면... 어디보자... 저리 돌려 볼까… 어디보자… 음…어…   뭔가 잘못 됐다는 걸 느꼈다. 나는 분명 ‘하기만 하는 순간 잘 할’ 사람인데 ‘했음에도’ 일이 손쉽게 풀리기 않기 시작한 거다. 내 머리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된다고? 내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야만 무언갈 이해할 수 있는, 그저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의 몸 속에 곽미향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깨닳은 예서의 심정이 그와 같았으려나. 나는 그저 또래보다 직관이 조금 일찍 발달했을 뿐 천재는커녕 수재 축에도 끼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냉혹한 현실은 내 멘탈을 설탕처럼 부쉈다. 제길.  

삼각함수와 함께 찾아온 15년 인생 최대의 난관을 헤쳐나갈 선택지는 두 개였다.  

1. 내가 ‘그렇게까지 똑똑했던 건 아니’었던 것을 인정하고 될 때까지 해본다.
2. 모르겠고 아무튼 우주가 뒤틀려 버린 것일 테니까 별 신경쓰지 않고 그냥 ‘안’ 해버린다.  

내 선택이 뭐였는지 말해 뭐하겠는가. 뒤도 볼 것 없이 2를 택한 후 망나니 같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길 위엔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의 걱정이 끝없는 카페트처럼 깔려 있었다. 우려와 걱정. 저저 저놈 갑자기 왜 저래? 반에서 3등씩은 하던 녀석이 20등, 30등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치니 당연한 반응이었을 터. 그 시절 가장 많이 듣던 말은 단연 이것.    

갑자기 왜 저런대? 하면 잘 할 애가.
 
 
#3 그놈의 <하면 잘 할 애>. 빌어먹을 <하면 잘 할 애.>  

저 저주의 문장은 내 안에 주홍글씨처럼 인으로 박였다. 과장 없이 라면 먹는 날보다 저 말 듣는 날이 많았을 정도니까. “해봤는데 잘 안 되던데요.” “저 그런 애 아닌데요.” 목젖까지 치달은 문장들은 자존심이란 수문장에 번번히 가로막혀 끝내 입 밖으로 뱉어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안타까움 크기가 커질수록 내 부담감 또한 날로 심해졌다. '하기만 하면 뭐든 척척 해낼 애'라는 이미지는  자연 법칙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한 번 물줄기가 든 흙바닥 사이로 계속 물이 통해 고랑이 되는 이치와 같이, 어느새 나는 “했는데 잘 안 되면 큰일 나는 애”가 되어 있었다. 그 부담과 두려움은 연일 내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점차 ‘무엇도 시도하지 않는 애’로 변해갔다. 시도하지 않으면 적어도 주변을 실망시킬 일은 없으니까. 최소한 내가 무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진 않으니까. 가능성과 잠재력은 내가 시도하지 않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100% 확신이 들지 않는 일은 시작하지 않았고, 슬프게도 세상에 100% 확신할 수 있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우습고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하자면, 그 두려운 와중에도 은근히 주변의 기대와 걱정을 즐겼다는 거다. 그럼요. 저는 못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안 하는 겁니다. 시도하지 않은 영역에 존재하는 내 잠재력에 대한 주변의 기대를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즐겼다. ‘삐뚤어진 길을 걷는 비운의 천재’ 나쁘지 않은 타이틀이었다. 어쩔 땐 흐뭇해하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삼각함수로부터, 주변의 기대로부터, 내 평범함으로부터 도망치다 다다른 곳이 어느 퀘퀘한 고시원 구석 한 켠이었으리라.   

#4 “수고 많았어. 최선을 다 해 줘서 고마워.”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이 알제리에게 처참히 깨졌던 날. 한국보다 처참하게 내가 깨진 날이기도 했다. 주위의 응원을 받으며 제대로 마음먹고 도전했던 시험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던 날. 그날 내가 들었던 저 말의 온기는 아직까지 내 귓등 어딘가에 남아 있다.  

‘하면 잘 할 애’가 ‘했는데도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망하는 사람도,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건 내 상상 속의 우려일 뿐이었다. 나를 "했는데 잘 안 되면 큰일나는 애"로 규정한 사람은 우주에서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주변인들의 기대 때문에 무엇도 시도 못한 채 도망칠수밖에 없었다’ 라는 건 그저 용기도, 확신도, 재능도 없는 평범한 철부지의 합리화였을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평범한 내 모습을 온전히 마주하고 미래를 위한 작은 도전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잘 해! 잘 하고 와! 잘 하자! 잘 될 거야!” 기대와 격려의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이 돌처럼 경직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 주변을 실망시킬까봐, 내 무능이 드러날까봐 모두가 내 실패를 비난할까봐 끝없는 불안에 먹먹해지는 사람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멋대로 상상하고 괴로워 할 필요는 없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다. "면접 잘 보고 와."는 그저 그의 바람일 뿐이다. 당신이 면접을 잘 봐 원하던 회사에 합격한 후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상대방의 사랑이 담긴 말일 뿐이다. 결코 "면접 못 봐서 탈락하면 너에게 실망할테야." 가 아니란 뜻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급적이면,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잘' 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으면. '잘' 보다 좋은 '열심히'라는 단어가 있으니까.  

지금 무언가에 도전 중인 아무개씨. 부디 열심히 하시길. 열심히 하고 오시길.
#고민#너는 하면 잘 할 거야#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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