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나는 왜 꽈배기처럼 꼬인 걸까
배배 꼬인 모습이 꼭 나 같다고.
집 근처에 꽈배기를 파는 가게가 있다. 이따금씩 그 집에 들러 꽈배기를 사면서 작업 과정을 지켜보곤 한다. 과정은 대략 이렇다. 뚝 떼어진 동그란 반죽이 얇고 길게 밀린다 → 주인아저씨가 손목을 탁 튕기면 반죽은 알아서 휘리릭 감긴다 → 꼬일 대로 꼬인 반죽을 기름에 넣으면 뜨끈하고 쫀득한 꽈배기가 완성된다. 그렇게 홀린 듯이 꽈배기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엉뚱한 생각이 든다. 배배 꼬인 모습이 꼭 나 같다고.
중학교 때였다. TV 속 연예인들을 보며 엄마는 항상 눈을 흘기셨다. “쟤는 뭐 저렇게 날씬해? 세상 혼자 사나 봐. 재수 없어”라고. 어린 맘에 나는 생각했다. ‘재수 없다는 말은 곧 부럽다는 표현이구나.’ 공교롭게도 그 말을 들은 며칠 후에 장염에 걸려 심하게 앓았다. 사흘 동안 4kg이 빠졌을 정도로 증세는 심각했다. 그렇게 심하게 앓은 뒤 학교에 갔는데 친구들 말했다. “야 너 왜 이렇게 살을 뺐어? 마른 거 봐. 재수 없다.”라고.
난 분명 아팠던 건데 이상하게도 괜찮으냐는 말보다 살 빠져서 좋겠다는 말을 먼저, 또 훨씬 많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마름은 어떻게 얻어진 것이든 간에 무조건 좋은 거고, 그것에 대해 다소 격한(?) 표현을 섞어가며 꼭 부러워해야 한다고. 중학교 내내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레 습관이 됐다.
그 습관이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였다. 동네에 있던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는 버스를 타고 30분을 넘게 가야 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에 나는 친구를 만들기 위해 없는 친화력까지 끌어모아 말을 걸었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고, 그중에는 굉장히 마른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참 좋았다. 친해지고 싶어서 볼 때마다 말을 걸었다. 말라서 좋겠다고, 부럽다고. ‘재수 없다’고. “이제 그런 얘기 그만했으면 좋겠어. 나 마른 게 스트레스야. 이게 왜 재수 없는 거야?”
한동안 내 말에 아무런 대꾸가 없었던 친구가 어느 날 말했다. 나는 좋아서 칭찬한 건데…. 원래 이렇게 말하는 거 아니었어?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온갖 의문이 들며 혼란스러웠다. 더 의아한 것은 주변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모두들 날 질타의 눈으로 바라봤다. ‘고등학교는 좀 다른가? 얘들은 이런 말을 싫어하나보다.’ 그때는 이렇게만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내내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을 연습했다.
3년 동안 훈련한 결과인지 대학에 와서는 눈치껏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됐다.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생각이 계속해서 나를 좀먹어 갔다.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을 뿐, 속으론 여전히 남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부러워했다. 그리고 이내 그 부러움은 미워하는 마음과 질투로 변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한 번씩 꼬아서 생각했던 것이다.
남들을 향해 꼬인 시선은 결국 내 자신을 괴롭힌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탓일까. 한번 꼬여버린 생각이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다. 튀겨지고 나서 시간이 흘러 딱딱해진 꽈배기처럼. 다시 반죽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그러면 꽈배기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텐데. 예를 들면 소시지를 감싸 안은 핫도그나 둥글둥글한 도너츠 같은 것이. 그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며 속으로 외쳤다. 꽈배기처럼 꼬인 나와 이제 그만 작별하고 싶다고.
"20대가 살아가는 진짜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글 쓰는 20대> 카테고리에서 에세이를 작성해주세요"
중학교 때였다. TV 속 연예인들을 보며 엄마는 항상 눈을 흘기셨다. “쟤는 뭐 저렇게 날씬해? 세상 혼자 사나 봐. 재수 없어”라고. 어린 맘에 나는 생각했다. ‘재수 없다는 말은 곧 부럽다는 표현이구나.’ 공교롭게도 그 말을 들은 며칠 후에 장염에 걸려 심하게 앓았다. 사흘 동안 4kg이 빠졌을 정도로 증세는 심각했다. 그렇게 심하게 앓은 뒤 학교에 갔는데 친구들 말했다. “야 너 왜 이렇게 살을 뺐어? 마른 거 봐. 재수 없다.”라고.
난 분명 아팠던 건데 이상하게도 괜찮으냐는 말보다 살 빠져서 좋겠다는 말을 먼저, 또 훨씬 많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마름은 어떻게 얻어진 것이든 간에 무조건 좋은 거고, 그것에 대해 다소 격한(?) 표현을 섞어가며 꼭 부러워해야 한다고. 중학교 내내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레 습관이 됐다.

그 습관이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였다. 동네에 있던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는 버스를 타고 30분을 넘게 가야 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에 나는 친구를 만들기 위해 없는 친화력까지 끌어모아 말을 걸었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고, 그중에는 굉장히 마른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참 좋았다. 친해지고 싶어서 볼 때마다 말을 걸었다. 말라서 좋겠다고, 부럽다고. ‘재수 없다’고. “이제 그런 얘기 그만했으면 좋겠어. 나 마른 게 스트레스야. 이게 왜 재수 없는 거야?”
한동안 내 말에 아무런 대꾸가 없었던 친구가 어느 날 말했다. 나는 좋아서 칭찬한 건데…. 원래 이렇게 말하는 거 아니었어?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온갖 의문이 들며 혼란스러웠다. 더 의아한 것은 주변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모두들 날 질타의 눈으로 바라봤다. ‘고등학교는 좀 다른가? 얘들은 이런 말을 싫어하나보다.’ 그때는 이렇게만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내내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을 연습했다.
3년 동안 훈련한 결과인지 대학에 와서는 눈치껏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됐다.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생각이 계속해서 나를 좀먹어 갔다.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을 뿐, 속으론 여전히 남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부러워했다. 그리고 이내 그 부러움은 미워하는 마음과 질투로 변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한 번씩 꼬아서 생각했던 것이다.
남들을 향해 꼬인 시선은 결국 내 자신을 괴롭힌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탓일까. 한번 꼬여버린 생각이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다. 튀겨지고 나서 시간이 흘러 딱딱해진 꽈배기처럼. 다시 반죽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그러면 꽈배기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텐데. 예를 들면 소시지를 감싸 안은 핫도그나 둥글둥글한 도너츠 같은 것이. 그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며 속으로 외쳤다. 꽈배기처럼 꼬인 나와 이제 그만 작별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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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호 - 20's voice]
Writer 독자 이주희 lilycoster@naver.com
#꽈배기#에세이#품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