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결혼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일어날 일
결혼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나에게 닥칠지 모를 일

01.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할 수 없다
20년째 같이 산 동거인 A가 아프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하지만 지방에 계시는 A의 부모님이 올라오실 때까지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3시간 동안 A는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수술 후유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아픈 A가 기억할 수 있을까 걱정돼서 왜 나에게는 추가로 설명해주지 않냐고 물었다. 돌아온 간호사의 대답은 “두 분 무슨 사이신데요?”

한바탕 병원 소동을 치르고 나니 문득 ‘A가 갑자기 죽는다면 어떨까?’ 걱정이 들었다. 혼인과 혈연으로 얽힌 관계가 아니니까 A를 위해 장례 휴가를 쓸 수 없겠지. 연락 한 번 안 했던 A의 사촌이 나타나서 재산 상속을 요구한다면, 허둥지둥하는 사이 A의 명의로 돼 있던 아파트에서 쫓겨나겠지. 나는 A의 재산에 대해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을 거다.

03. 우리도 외벌이인데 왜 세금을 더 내야 해요?
작년 봄, A가 실직했다. 새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내 월급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로 했다. 하지만 연말정산에서 세금 혜택은 받을 수 없었다. 원래 연간 소득이 100만원 이하인 가족이 있으면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외벌이 부부가 1인 가구보다 세금을 적게 내는 이유다. 그런데 A는 가족이 아니므로 나는 사실상 싱글세를 내야 했다.

04. 따로 사는 부모님은 되고, 동거인은 안 되는 가족 할인
대학생 땐 부모님과 따로 살아도 통신사 가족 할인을 받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같이 산 세월이 20년이 넘는 A와는 절대 가족 할인을 받을 수 없다. 내 휴대폰과 TV 요금을 묶고, A 휴대폰과 인터넷 요금을 각각 묶어서 겨우 조금 절약하는 수준이다. 이뿐인가? 내 항공사 마일리지도 A와 함께 쓸 수 없다. 가족에겐 당연히 보장되는 권리인데 말이다.

05. 미혼 동거인들을 위한 집은 없다
월세방을 옮겨 다니는 데 지쳐서 전세 혹은 매매로 집을 알아보는 중이다. 각종 주거 지원 정책을 알아봤지만 어디에도 미혼 동거인들을 위한 법은 없다. ‘정상 가정’이 아니라면 1인 가구로 취급 받기 때문. 국민임대주택의 경우 1인 가구는 15평 이하만 신청할 수 있다. 낮은 이자로 대출 받을 수 있는 2인 가구도 신혼부부 뿐이다.
+ 그래서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합니다
생활동반자법이 뭔데요?
‘생활동반자에 관한 법률안’은 혈연과 혼인 관계를 뛰어넘어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을 동반자로 지정하는 법입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나와 생활을 같이 하는 다른 성인을 동반자로 지정할 수 있게 되죠. 생활동반자 지정은 이성뿐만 아니라 동성 간에도 가능합니다.
부부랑 뭐가 다른데요?
공동생활을 둘러싼 법적 권리가 생긴다는 점에서 결혼 제도와 비슷하지만, 생활동반자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이뤄지는 ‘계약’ 관계입니다. 상대방의 가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죠. 성립과 해소 절차도 혼인보다 간단합니다.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지향하는 법이에요.
이 법이 통과되면 뭐가 좋나요?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법적 보호자, 법정 대리인이 됩니다. 엄마, 아빠, 동생, 아내, 남편 사이에만 가능했던 것들이 동반자 관계에서도 가능해집니다. 서로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사회보장,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어요. 국민건강보호법, 소득세법, 의료법 등에서 동반자가 배우자에 준하는 권리를 갖게 개정되거든요. 물론 관계에 대한 의무와 책임도 함께 지게 됩니다.
이런 관계가 가능한가요?
외국의 선례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 (PACS·팍스) 제도, 미국의 ‘지역 파트너십’ 제도, 독일의 ‘생활동반자관계’ 등이 활발하게 시행되고 있어요. 조건과 의무는 다르지만 법적 가족과 유사한 권리를 보장해준다는 점이 같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2017년 약 20만 쌍이 팍스 제도를 통해 계약을 맺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논의가 가능한 법이겠죠?
[886호 - special]
illustrator 몽미꾸
#대학생#동거#생활동반자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