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어디에 있든 중요한 건 네 마음이야

‘어떻게든 정착해서 잘 살아내야 한다’라는 질책

4월의 어느 주말, 친한 오빠 결혼식 때문에 부산에 갈 일이 있었다. 간 김에 연차를 하루 붙여 혼자 여행하고 오기로 했다. 월요일 오전, 한적하고 여유롭게 천천히 부산을 둘러보자 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부산에 가면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부산에서 피난민들이 이동하다하다 정착했다던, 바닷가 절벽에 집들이 작게 위치한 곳. 영도. 그곳에서 한 시인이 운영하고 있다는 ‘손목서가’라는 곳에 갔다.  

서점과 카페를 같이 운영하고 있는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장소가 너무 좋아서 방금 커피를 마시고 왔건만 또 드립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삐걱거리는 바닥, 날것의 인테리어, 무심히 매달려 있는 유리 공예… 책과 커피 냄새 속에 공간을 둘러보는데 책장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유미코,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야 한다. 그때는 엄마와 같이 살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 원작 소설에서 
 

 왈칵 눈물이 맺혔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내 서울살이 7년이 떠올랐다. 나는 할머니와 삼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 생활 4년, 그리고 회사 생활도 3년이나 했다. 꽤 괜찮은 직장에 정착해서 다니는데 이 회사가 나랑 맞는 곳일까. 내가 잘하고 있을까. 이 곳이 내가 있을 곳이 맞을까? 라는 생각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분명 서울은 내가 십 대 내내 꿈꿨던 곳인데. 고등학교 단짝과 쓴 작은 꿈 리스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꼭 인서울 해서, 한강 옆에 살면서 한강에서 아침 조깅하기.’ 나는 결국 인서울도 했고, 한강 옆 오피스텔에도 사는데, 아침 조깅은 아니지만 주말에 자전거도 타는데. 그 종이에 따르면 난 꿈을 이뤘는데, 왜 이 꼴일까.
    
출근길 9호선 지옥철에 실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단체로 클럽에 온 듯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야 할 때,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서 어질러진 방구석을 볼 때, 뭘 먹으려 해도 설거지거리로 가득 차 있어 도저히 그릇과 젓가락을 찾을 수 없을 때, 집구석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고향에 내려가는 건 뭔가 패배하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느끼는 직장의 안정성과 연봉에서 오는 성취감, 친구들과의 문화생활이 주는 기쁨을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언제든 힘들면 내 마음이 편한 곳에서 여유롭게 살면 돼’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 스스로에게 못 해주고, ‘어떻게든 이곳에 정착해서 보란 듯이 잘 살아내야 한다’라는 질책만 했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보란 듯이’란 말인가.  

부산 바닷가 절벽 마을에 있던 그 작고 낡은 서점이 대신 나에게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언제든 힘들면 돌아가도 돼. 엄마는 언제든 널 받아줄 거야.’ 서점을 떠나 부산역으로 향하던 길, 마을 할아버지가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길목에서 말을 걸었다. “뭐 구경할 게 있어요? 난 맨날 여기 사니까 모르겠어.”  

아, 나에게는 너무나 살고 싶다는 감정을 준 바닷마을인데. 직장을 옮겨서라도 한적하게 바다를 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준 부산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너무도 익숙해서 그 소중함을 모르게 되는 걸까.  

“제주에 있어도 마음이 지옥 같은 사람도 있어. 서울이든 제주든 어디에 있든 중요한 건 네 마음이야.”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는 그렇게 말했었다. ‘맞아. 서울에 있든 부산에 있든 중요한 건 내 마음이야.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으면 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서울행 기차 안에서 결론 지었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헤맨다.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일까. 부산에 살고 싶다. 서울에 살고 싶다. 엄마 집에도 살고 싶다….  
 

[889호 -20's voice]

Writer 독자 이현정 hyeonjung92@naver.com
#20's voice#질책#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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