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우리는 얼평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외모에 언제까지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해야 할까?
생각보다 덜 예뻐서 사과라도 할까요?   

얼마 전, 예닐곱 명이 모여 함께 술을 마셨다. 어떤 행사를 기획하며 같이 일한 분(편의상 A씨라 하자), 그리고 그 일에 연관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테이블에 술병이 늘어갈수록 쓸데없는 말도 쌓이게 마련이다. 먼저 취한 A씨가 대화의 맥락과 상관없이 불쑥 내 얼굴을 평가했다.  

“선우 씨는, 생각만큼 예쁘지가 않아~!” 덜 취했던 나는 웃으면서 대응했다. “아니, 이만하면 예쁘지 뭘 더 어쩌란 말이에요? 우리 아빠 엄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그랬다고요!” 농담으로 받아쳤지만, 취한 사람은 ’적당히’를 모른다. “아니, 나는 더 예쁠 줄 알았다고~(딸꾹)!”  

A씨가 내게 기대한 ‘더 예쁨’은 뭐였을까. 패션 매거진 에디터로 오래 일했다고 하니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의 여자들처럼 마른 몸, 세련되고 멋진 외모를 예상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에밀리 블런트나 앤 해서웨이처럼 안 생겼다는 이유로 사과를 해야 하나? A씨는 나에 대해서 “오랜만에 일 잘하는 실장님이랑 손발을 맞추는 짜릿함이 있었어.”라는 얘기도 했는데 그건 취하기 전이긴 했다. 내가 남자였다면 아마 거기서 그쳤을 텐데, 여자들은 종종 일을 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한 취급을 받는다.  

면전에서 안 예쁘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불쾌하지 않았다. A씨가 취하기도 했고 나와 별 상관없는 사람의 외모 평가란 게 나에게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 나이 먹으면서 생긴 긍정적인 변화다. 나는 40대고, 40년씩이나 한 얼굴을 보다 보면 꽤나 정이 든다. 어렸을 땐 불만도 많고 콤플렉스도 있던 얼굴이지만 오래 익숙해져 이제는 내 생김새에 대해 제법 편안해진 상태다.  

46kg이 됐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시절 

  더 예뻐지고 싶다거나,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하지만 20대 때의 나에게 예뻐지는 과정이란, 예쁘지 않은 현재의 나를 부분 부분 토막 내서 인식하는 일이었으며, 어떻게 바꿔야 할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었다. 메이크업이나 다이어트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 일은 게으른 자기 방치로 여겨지기도 했다.  

얇은 입술이 맘에 들지 않아 앤젤리나 졸리처럼 도톰하게 만들어준다는 립글로스를 사서 발랐으며, 속눈썹 연장 시술 시기를 놓쳐 불안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뻥튀기 같은 것으로 허기를 달래면서 살을 빼느라 영양의 균형이 망가지기도 했다. 그렇게 46kg까지 체중을 줄였지만, 신기하게도 행복하지 않았다. 이래도 나, 저래도 나였다.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아이린이나 이하늬 같은 미녀가 되는 일은 불가능한데, 언제까지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해야 할까?  

나는 그냥 불완전한 외모인 채로도 기분 좋게 살아보기로 했다. 완벽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나를 몰아붙이는 대신 나의 돈과 시간과 에너지, 내가 가진 가용 자원을 더 좋아하는 일에 사용하기로.  
  
외모에 대한 인식이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였다. 체중이 몇 kg인가보다 몇 kg짜리 바벨을 들고 데드리프트를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고, 자전거를 멈추지 않고도 업힐을 오를 수 있는 힘의 원천인 내 두꺼운 허벅지가 사랑스러워졌다. 인생에서 가장 말랐을 때는 기운도 의욕도 비실비실했는데, 살과 근육이 붙어 몸이 더 커지면서 활력이 생겼다. 더 많은 일에서 적극성과 근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전에서 ‘몸’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이루는 전체, 또는 그것의 활동 기능이나 상태.” 지금까지 내 몸이 어떻게 기능을 수행하는지, 어떤 건강 상태에 있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이상할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겉모습에만 치중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승리가 아니라 정신의 자유니까   

이제 나는 못생겼다는 이야기보다 이런 평가를 받으면 속상할 것 같다. 업무 처리가 엉망이었다거나, 글이 형편없다거나, 일의 효율이 낮다는 인사 고과 같은 것.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덕목은 이런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가깝고도 소중한 친구들, 내 글의 독자들, 나를 신뢰하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품성이나 역량 면에서 다양한 강점의 복합체인 사람이다. 그건 내가 어찌하기 어려운 외양이 아니라, 20년 이상 성실하게 차근차근 쌓아온 노력의 총합이다.  

살다 보면 외모를 깎아내리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생긴다. 그 공격이 자존감을 훼손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자. 당신의 본질은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 규정하는 거니까. 이 글을 읽고 내 사진을 검색해본 다음 “역시 안 예쁘니까 저런 소리를 하네.” 하고 단정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나의 이런 태도를 두고 정신승리라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신의 자유’ 문제라 바로잡고 싶다. 자유로워지는 건 정말 짜릿한 경험이어서 한번 느끼고 나면 그 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비록 칭찬일지라도 누군가에 대해 언급할 때 얼굴이나 외모 평가를 덜해보는 것은 우리가 함께 자유로워지는 작은 출발이 될 수 있다. 모두의 본질이 껍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합의를 공유한 채 각자의 지향점을 향해 노력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때, 우리는 아주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894호 - think]

WRITER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 에디터)
ILLUSTRATOR 강한    
#894호 think#에세이#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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