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에서 더 많은 삽질을 해도 괜찮은 이유
이 글을 쓰는 장소는 호주의 아름다운 휴양도시 골드코스트다. 올해 초 세상에 내보낸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가 좋은 반응을 얻어, 공동 저자이자 동거인인 김하나와 함께 퀸즈랜드 관광청에 초대를 받아 여행 중이다.
퀸즈랜드는 넙적한 고양이 얼굴처럼 생긴 호주 대륙의 오른쪽 귀와 윗뺨에 해당하는 동북부로, 북반구인 미국으로 치자면 남서부 캘리포니아처럼 건조하고 더운 기후를 가진 지역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커다란 땅덩어리와 비슷하게 뜨거운 태양, 야자수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5년 전 <코첼라 뮤직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내 인생의 가장 거대한 삽질이었을 그 흙먼지 날리던 날이.
페스티벌이 열리는 인디오 근처 숙소들은 LA에서 차로 두 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었다. 이미 2년 전 같은 페스티벌에 다녀간 적이 있었기에 나는 자신만만하게 효율적인 루트를 짜놓고 있었다. LAX 공항에 도착한 건 오전 11시 무렵. 근처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은 다음 렌터카를 빌렸다. 호텔에 먼저 체크인을 하고 나서 들른다고 해도 사막 한가운데 통나무집에 예약해둔 저녁 식사까지는 넉넉하게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LA 시내를 지나서 고속도로를 타려 할 때 문제가 생겼다. 분명 눈앞에 표지판들이 보이는데, 렌터카의 내비게이션은 자꾸만 다른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속도로에 오르기만 하면 잘못된 경로라며 곧바로 빠져나가라는 명령이 반복됐다. 길이 헛갈리거나 내비게이션의 지시를 알아듣기 힘들 때 운전자들은 당황하게 마련이지만, 그 안내가 영어일 때는 몇 배로 당황스럽다. 입력된 목적지를 확인해봐도 잘못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공사 중이어서 우회도로를 알려주는 건가 의심하며 계속 차를 몰았더니 좁은 국도로만 향하다가 나중에는 급기야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인적이 없는 미국 지방 도로, 먼지가 폴폴 날리는 사막 한가운데, 점점 흘러가는 시간… 악몽 아니면 시트콤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조수석에 앉은 유일한 동행은 면허가 없는 친구라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계획한 대로 여행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너무 좌절하지 말 것
원인을 파악한 건 밤이 되어 겨우 숙소에 도착해서였다. 2시간 반 되는 거리는 6시간 넘게 걸렸고, 이미 저녁 예약은 물 건너갔으며 내내 운전에 시달린 어깨며 목은 뻣뻣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무엇에 홀린 건 아닐까, 주차장에서 내비게이션을 이리저리 조작해보다가 찾아냈다. ‘설정’에서 ‘고속도로 회피’ 옵션이 켜져 있었다는 것을. 렌터카를 이전에 빌린 사람이 무슨 이유에선지 돌아가려 그렇게 해두었던 것이다. 너무 사소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이 경험 뒤로 내 여행 방식에는 약간의 디테일이 더해졌다. 렌터카를 빌려 운전할 때 차 상태와 함께 내비게이션 옵션도 체크할 것, 번갈아 운전할 수 있는 동행과 함께할 것, 차에는 비상시에 당을 충전할 수 있는 간식을 상비할 것. 무엇보다, 계획한 대로 여행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너무 좌절하지 말 것. 여행에서의 사건 사고란, 웃어버릴 수만 있다면 다 추억이 되니까. 그보다 두 해 전 아무 문제 없이 수월하게 같은 여행지에 갔을 때의 뻥 뚫린 고속도로보다, ‘삽질’ 여행 때 비포장도로에서 봤던 흙길과 돌산 풍경이 여전히 더 강렬하게 떠오른다.
여행에는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는 경험들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아니, 예측을 빗나가고 계획에 배신을 당할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게 여행의 신기한 점이다. 더 나쁜 것뿐 아니라 더 좋은 것도 때로는 우리의 통제 밖에서 오기 때문이다.
발다닥으로 디뎌봐야만 알게 되는 새로운 진실들
이번 퀸즈랜드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도 평소의 나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일정들에 있었다. 아침잠이 많아 보통은 해돋이 같은 걸 보러 갈 엄두도 못 내는데, 멋진 영상을 담고 싶어 하는 촬영팀을 따라갔다가 감동적인 일출 광경을 만났다. 또, 바닷가에서 달리기하는 건 극기훈련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뛰어 보니 정말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다. 내가 경험한 다른 해변과 달리 백사장이 굴곡 없이 편평하게 펼쳐져 있고 고운 모래가 바닷물에 다져져 발이 빠지지 않도록 탄탄하게 받쳐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디뎌봐야만 알게 되는 새로운 진실들이 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뭘까? 그 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접하거나 복잡한 일상을 잊고 즐기기 위함도 맞다. 그리고 결국 돌아와 계속되는 삶에서도 만나게 되는 돌발 상황, 내 머리 밖의 진짜 현실을 받아들이는 유연성과 적응력을 키우는 기회이기도 하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얼마나 실행에 옮겼는지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다양하게 시도하다가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본 다음 뭔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나는 응원한다. 우리 삶에 고유한 개성과 이야기를 부여하는 건 매끈한 단면보다는 울퉁불퉁한 굴곡들이다. 적어도 더 많은 삽질을 해본 사람의 인생에는, 더 많은 추억이 만드는 다채로운 무늬가 생긴다. 실패해도 쉽게 망가지지 않는 회복 탄력성은, 그런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받는 선물일 것이다.
[903호 - special]
Illustrator 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