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제1회 댕낼 백일장 에세이 부문 입상작

‘나의 20대’를 주제로 7편의 입상작들을 소개합니다.
지금이 아닌 계절을 사랑해  

입상작
12학번 김민범 

그 시간 동안 적당한 연애를 했고, 취기가 돌 때 잔을 꺾는 법을 배웠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없다. 유난히 불행했던 것도, 좋았던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합격 조회를 하는 세 번의 겨울이 지나고 나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 취했다. 허망함이 숙취처럼 들러붙었다. 지독한 기억이 된 첫사랑은 편지를 쓰게 했고, 백 통을 써주겠다는 약속이 이뤄질 때쯤 연애가 끝났다. 이별은 한참이나 더 걸렸다.  

경계 근무지에서의 악독한 추위가 가시자 복학생이 되었다. 뭐가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사방을 기웃거렸다. 영화제부터 변기 세정제 홍보까지 기회만 준다면 나를 잘게 갈아 넣었다. 아주 가끔 공부와 과제로 밤을 지새우며 어설픈 말들을 쏟아냈다. 그 시간 동안 적당한 연애를 했고, 취기가 돌 때 잔을 꺾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칠 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이십 대의 끄트머리에 서서 생각해보면 이십 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모두와 잘 지낼 수는 없음을 배웠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냈다. 오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뻑뻑해진 눈을 감고 읽었던 구절을 떠올리기를 좋아한다. 혼자 영화 보는 편을 선호하고, 낯선 도시의 극장과 서점을 찾아 헤매는 여행이 즐겁다는 걸 안다.  

청춘을 갉아먹었다고 생각했던 수험 생활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편지를 모조리 환불받고 싶고, 매 순간 심장에 생채기를 내던 아픔도 결국 무뎌졌다. 생애 주기에 맞춰 사는 일에서는 이탈했지만, 불안하거나 불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간의 수많은 실패와 작은 성공으로 만들어낸 지금이 좋다.  

그러나 다시 살고 싶지는 않다. 지난 십 년 중 어떤 날에 놓인다고 해도 딱히 더 잘 살아낼 자신은 없다. 철인이 되어 다시 반복되는 일상을 긍정할 자신이 없다. 아마 더 많은 늦잠을 자고, 격하게 술에 취할 것이며 보다 쩨쩨한 사랑을 할지도 모른다. 부족하고 어설펐지만, 그게 나의 최선이었음을 어렴풋하게 깨닫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이 없고, 내 주변이 대단하게 변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 여기를 긍정한다.  

매일 반성하고, 채근했었다. 이따위로 살다가는 망하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망한 게 이 정도라면 앞으로도 견딜 수 있다. 두고 온 계절들을 사랑하지만, 거기 있기 때문에 애정할 수 있다. 가끔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떠올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앞으로도 한참 헤매야 할 다음 계절을 맞이한다. 악랄한 추위도, 욱신거리는 더위도 아무튼 지나간다. 더 이상 가망 없는 계절을 붙잡고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조금 더 근사한 실패를 기다린다.

올해의 나이, 올해의 공간

입상작
14학번 김아진 

나는 아직도 내 나이가 낯설다. 스물여섯도 초면 같은데 머지않아 스물일곱이 되어버린다니.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제자리에 고여 있다는 기분이 들 때 나는 쉽게 과거에 매몰되어버린다. 스물여섯,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내 나이가 낯설다. 스물여섯도 초면 같은데 머지않아 스물일곱이 되어버린다니. 나이가 꼭 물 먹은 짐처럼 느껴지는 건 내가 쥐뿔 없는 취준생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20대에 있어 (대)위기는 3년을 주기로 찾아오는 난이도 극상의 퀘스트 같다. 스무 살엔 재수를 하느라 스물을 열아홉처럼 흘려보냈고, 스물셋엔 ‘대3병’을 앓다 도망치듯 휴학을 해버렸고, 스물여섯엔 높디높은 취업의 문턱을 몸소 체감하고 있으니. 경험치가 쌓여 조금은 무던해질 법도 한데, 스트레스에 취약한 성격 탓인지 꼭 그렇지도 못하다. 불안을 온전히 끌어안고 그 질감과 굴곡을 찬찬히 아로새기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어른들 말마따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 그럭저럭 괜찮아지는 듯했고, 나는 그 흔적을 움켜쥐고 겹겹이 자라났다.  

그렇더라도 시간은 흐른다는 당연한 명제가 당장의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 위기는 언제나 위기다. 다 지나갈 거라는 식의 막연한 낙관이야말로 오히려 공허하다. 미래야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현실은 가차 없고 나는 여느 취준생이 그러하듯 틈틈이 비관적이 되곤 하니까. 지난 주말엔 같은 시로 묶이지만 구는 다르고, 동네라 부르기엔 조금 멀지만 심리적 거리는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을 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친구가 사는 동네까지 한 번에 가지만 조금 돌아가는 버스를 탔고, 덕분에 새삼 구경하는 기분이 되었다. 서울 방향의 익숙한 중앙 차로를 쭉 지나 좌회전을 해 다시 우회전한 후,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있는 곳, 지겹도록 다녔던 학원과 재수학원이 있는 학원가를 찍고 조금 더 돌아 들어가서야 친구의 동네가 나왔다.  

매일의 목적(가령 학교나 학원에 간다는)이 사라지자 좀처럼 가지 않게 된 그 동네들을 지나며 공간에도 수명이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삶에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 따위의 지극히 개인적인 밀도로서의 수명이. 실로 오랜만에 옛 공간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채로 잘 있구나, 다행인 건가, 하며 이상한 안도를 느꼈다.  

올해의 나는 매일 종로에 간다. 즐비한 오피스에서 쏟아지는 직장인들, 각종 학원의 수강생들, 탑골 공원을 찾는 노인들, 다양한 국적을 가진 관광객들, 정해진 구역을 사수하는 노숙인들로 가득한 주중의 종로는 그야말로 묘하다. 처음 종로에 발을 들였던 여름의 초입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사이 나는 자주 가는 커피집의 사장님과 안면을 트게 됐고, 도장 열 개를 찍으면 커피 한 잔이 무료인 쿠폰에는 꼬박꼬박 도장이 쌓이고 있으며, 익숙한 골목과 종종 생각나는 메뉴가 있는 식당의 목록이 생겼다. 매일의 목적이 있는 공간이 그렇게 종로로 옮겨 왔다.  

요즘엔 주기적으로 감정이 널뛰곤 한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시들해지고, 시들해졌다가도 물러진 의욕을 주물러 다시 모양을 잡는 식이다. 그러니까 그건 한마디로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래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언제고 시간이 흘러 다시 종로에 왔을 때, 지겹도록 거닐었던 종로의 학원가를 다시 걸을 때, 오래된 기억이 주는 특유의 감정을 거리를 두고 곱씹을 수 있도록. 내 스물여섯이 곳곳에 스며있는 공간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으려고.

한 시절 같은 스타렉스를 보내며

입상작
12학번 최효정

심란했고 최선이었고 덜덜거렸고 역부족이었던 내 20대와 아빠의 50대의 한 부분이 지나고 있었다.
 
“에이 못 타요. 폐차시키세요.”
“그래도 20년은 타고 보내려고 했는데….”

나는 그늘에 쪼그려 셈을 해봤다. 아빠가 스타렉스를 3년이나 더 탈 생각이었다는 것에 그만 아득해졌다. 아빠는 내가 10살 때 스타렉스를 샀다. 회사에서 빌려주던 파란 용달 트럭만 타다 처음 마련한 차였다. 9인승에 점잖은 코끼리 같은 모습이었다. 창문이 희한하게도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열리지 않는 차였다. 그마저도 좁은 틈으로 거센 바람이 와다다닥 들어와 바람을 아예 쐬지 않거나 너무 많이 쐬어야 하는 심란한 구조였다.  

스타렉스는 우리 가족을 이곳저곳으로 실어 날랐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후엔 집에서부터 지하철역까지 나를 실어 날랐다. 하지만 딱히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 우리 집은 역세권이라 걸어서 15분, 차로 10분 거리였다. 아빠는 시켜달라는 자취는 안 시켜주고 그거 5분 줄여 주겠다고 매번 차를 태워줬다. 아빠에게는 최선이고 내게는 별 의미 없는 호의였다.  

스물세 살, 나는 첫 운전을 스타렉스와 함께했다. 사실 운전이라고 하기엔 조금 난해한 것이 주차장을 나오기 전에 후진으로 담장을 박고, 작용에 대한 반작용을 스스로 주기 위해 액셀을 밟아 아파트 화단을 받았다. 그러니 박치기 2회라고 부르는 편이 합당하다. 덕분에 스타렉스의 앞바퀴에는 이에 파슬리가 끼듯 나뭇잎이 풍성히 끼었고, 뒷유리는 아작이 났다. 아빠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대신 5년 만에 끊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올 초에 나와 동생은 서울로 독립을 했다. 역시나 스타렉스와 함께였다. 이삿짐을 한가득 실은 차 안에서 아빠는 “너희 결혼 할 때까진 아빠가 데리고 살려고 했는데…”라고 어물거렸다. 나는 이불 보따리에 기대어 그게 무슨 턱도 없는 소린가 생각했다. 전셋집에 도착한 우리는 스타렉스에서 짐을 빼내 3층까지 날랐다. 집에 짐이 쌓이는 만큼 스타렉스는 가벼워졌다. 엄마·아빠는 조금 더 커진 빈 공간을 싣고 다시 본가로 내려갔다. 배웅할 때 엄마·아빠의 눈시울이 조금 붉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올여름엔 나와 동생의 독립을 기념(?)해 가족 여행을 떠났다. 노쇠한 스타렉스는 오랜만에 장거리를 달려서 그런지 유난히 덜덜거렸다. 하지만 평소에도 낮잠 못 잔 영유아처럼 칭얼거렸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옛날 <위기 탈출 넘버원>에서 봤다시피 사소한 부주의는 큰 사고로 이어진다. 스타렉스의 보닛에서 곧 연기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연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엔진 과열. 더 직접적인 원인은 17년간의 노동. 카센터 사장님은 폐차를 권했다. “이거 수리해도 더 못 타요. 보내줄 때 됐어요.” “예… 이제 보내줘야죠….” 8월의 햇볕은 뜨거웠다. 아빠의 얼마 없는 머리숱은 그늘을 만들기에 역부족이었고 두피는 발갛게 익었다.  

아빠에게 이별은 언제나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다. 아빠는 항상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는 듯 보였다. 사실 아빠는 언제까지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 시간이 이렇게라도 떼어내는 건지도 몰랐다. 우리는 스타렉스를 카센터에 남겨 두고 택시를 탔다. 나는 생각했다. 스타렉스가 떠나듯이 우리 가족에게서 한 시절이 떠나고 있다고. 심란했고 최선이었고 덜덜거렸고 역부족이었던 내 20대와 아빠의 50대의 한 부분이 지나고 있다고. 스타렉스에 몸을 실었던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스타렉스의 나이 17세, 우리 아빠 나이 59세, 내 나이 26세의 일이다.

나방이 될지 나비가 될지

입상작
14학번 김근욱

걱정하지 마세요! 번데기는 에프킬라에 맞아 죽는 나방이 될 지 카메라에 담길 나비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1.

 “번데기요.”

21살, 대학교 2학년. ‘지성과 글’ 수업 시간. 자신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라는 교수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자리에 앉은 진규와 실컷 잡담을 나누었다. ‘현주네포차’의 닭도리탕과 ‘풍년포차’의 닭도리탕 중 어떤 것이 더 맛있는가? 열띤 논쟁를 벌이던 중 어디선가 들리는 내 이름 석 자에 벌떡 일어나 생각해낸 단어다. “왜 번데기죠?” 5초 만에 뱉은 레토르트 단어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첫 수업이니만큼 고심한 흔적이 묻어 나오는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에프킬라에 맞아 죽는 나방이 될지, 카메라에 찍힐 나비가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4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실제 번데기를 마주한 것 같은 께름칙함이 묻어나 있었다. ‘그렇게 별로인 대답인가?’  

2.
24살, 대학교 4학년. ‘스피치 토론 실습’ 시간. 사물을 이용해 1분 자기소개를 하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나는 또 한 번 번데기를 꺼내 들었다. “1년의 휴학 기간, 종로에 유명한 토익 강사가 있다고 해서 열심히 수업을 들었습니다. 자격증 하나는 기본이라 하기에 KBS 한국어능력을 땄습니다. 유효기간 2년이 지나면 사라질 껍데기들을 열심히 모았습니다. 그런데 껍데기도 쓸모가 있었습니다. 4학년이 된 지금, 모아둔 껍데기들을 제 주변에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낼 병사의 갑옷처럼 촘촘하고 단단하게 쌓았습니다. 개강 파티에 오라던 후배들의 연락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족발을 사주겠다는 고향 친구의 연락도 막아냈습니다. 일명 취업준비생. 줄여서 취준생. 다른 말로 번데기. 한 마리의 번데기가 되어 은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한쪽 눈에선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다른 눈에선 ‘동병상련(同病相憐)’이 느껴졌다.

“제가 불쌍하신가요? 아니면 여러분의 모습인 것 같아 슬프신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번데기는 에프킬라에 맞아 죽는 나방이 될지 카메라에 담길 나비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2년 후 껍질을 까고 세상에 나올 것입니다. 멋진 나비가 되어 말입니다!”

나를 위한 것인지, 리액션 점수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3.

“나방일까? 나비일까?”

밤은 산과 하늘의 경계를 무너트려 세상을 하나의 까만 덩어리로 만든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아침의 부산스러운 공기와는 다른 정적 속에, 나지막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할 일만 서둘러 마무리하고 나왔는데도 이미 12시가 넘어 있었다. 5시간 자고 출근하나, 4시간 자고 출근하나 피곤한 건 매한가지.

맥주 한 캔을 들고 종로에 있는 ‘시인의 언덕’에 올랐다. 대학 시절,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찾아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계단에 적힌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한참을 올라가니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블링블링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 서울에서 은하수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 별 하나에 야근과 그리고 별 하나에 팀장님! 팀장님!’ 피식, 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러분, 지나고 보니 나방도 아니고 나비도 아니고 반딧불이었네요. 그렇죠…?”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뚜렷하던 불빛들이 물감처럼 번졌다.

비행기를 타본 적 없는 사람

입상작
13학번 김해서

평생 청승이나 떨며 살아보라던 다그침. 정말로 나는 부지런히 청승을 떠느라 비행기도 한 번 못 타본 것일까.
  
나 비행기 한 번도 타본 적 없어.  

추석 명절이었다. 큰집과 외가가 있는 순천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가족들은 일제히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이냐는 물음에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다고 말했다. 제주도도 비행기로 가본 적 없는걸. 어쩌다가 그 얘기를 하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내 말을 듣고 엄마의 얼굴엔 한참이나 난색이 어렸다. 식구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나만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별 뜻 없이 뱉었는데 별 뜻이 되어버린 상황이라 나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난 왜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비행기를 타본 적 없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남친으로부터 이별할 때 들었던 폭탄 발언까지 떠올리고 만다. 늘 그랬듯 평생 청승이나 떨며 살아보라던 다그침. 정말로 나는 부지런히 청승을 떠느라 비행기도 한 번 못 타본 것일까. 남들이 제주도는 물론 해외 여러 나라에 드나들 때 뭐 했지. 기억을 해보려고 하니 기억이 아주 잘 난다. 오래전 일은 아니라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열아홉 살의 나는 아이슬란드나 여러 동남아 국가를 가슴에 품고 들떠 있었다. 시집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책이 여행 서적이었다. 그리고 그 소녀의 희망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꺾이고 만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동생이 중증 우울증과 사회불안이라는 병을 안게 되었고, 그 후 수년을 히키코모리로 보내게 된다. 말하자면 내 이십 대 초중반은 집과 서울을 오고 가며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좌절하고 이 센터 저 센터를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동생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타인의 병을 돌보는 일에 매몰된 나머지, 나와 내 곁의 사람을 지키는 법은 까맣게 잊고 사랑도 우정도 내팽개쳤다. 도태되고 고립되는 것보다 두려운 게 내가 노력한 시간을 보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이 망가지고 친구가 떠나더라도 반드시 동생은 회복되어야 했고 그래야만 내 상처도 꿰매질 것이라 믿었다. 그 사이 여행 책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고 열아홉 살 마음은 절반만 남겼다. 시나 질리도록 읽고 쓰면서.  

그렇다. 아무래도 난 정말 청승을 떠느라 비행기를 못 탄 것 같다. 공교롭게도 최근 독립출판으로 낸 잡지의 주제가 ‘도망자’였는데 나 같은 사람이 세운 주제치곤 거창해서 민망하다. 누군가의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콘텐츠로 제작하는 동안, 공항도 비행기도 몰라서 부단히 애썼다. 너무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잡지를 만드는 내내 좋아하는 시인님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중요한 건 타인의 삶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 것. 아픔도 사랑도 모두 내 것이 메인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것. 그 태도가 늘 인생의 해결책이 되어주진 않겠지만 스무 살의 내가 깨달았다면 좋았을 이야기다.  

생은 오이디푸스에게 내린 저주처럼 정의로운 마음과 상관없이 내 맘 같지 않은 곳으로도 흐르는 법이니, 늘 ‘나’로 사는 쪽이 결국 영웅이 되는 길이려나. 아, 그렇다고 더는 영웅처럼 비장하게 살고 싶진 않고 이쯤 되면 비행기나 타고 싶다. 첫 해외여행을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인데, 내 인생 최초의 ‘비행’을 상상하면 즐겁다. 어리숙한 출발. 신나는 도망. (절대 그런 안타까운 이가 내 곁에 있을 리 없다고 믿으나) 누군가 진지하게 ‘비행기는 신발 벗고 타는 거 알지?’라고 놀린다면, 그를 위해 긴가민가한 표정 정도는 지어줄지도 모르겠다.

너희는 CC하지 마라

입상작
16학번 김나현

아, 그때 헤어졌어야 했다. 나는 왜 헌신적이었는가. 왜 나는 헌신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했는가. 
 
나는 CC였다. 그냥 CC도 아니고 과CC였다. 그냥 과CC도 아니고 동기 과CC였다. 내가 헤어지자 얼마나 화제였던지 화재가 났다. 화재 연기 때문에 사방으로 뿌려지는 스프링클러 물에 흠뻑 젖은 채 강의실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건 그냥 수군대는 이수근들 때문에 물 흐르듯 흐른 내 식은땀이었다. 그런고로 내 대학 인생은 과CC였던 시간과, 과CC가 아니었던 시간으로 나뉜다.  

과CC를 할 때는 첫사랑의 풋풋함을 만끽하고 20대의 청춘을 나눌 수 있기는 개뿔 제발 CC하지 마라. 나는 새내기 3월, 워드아트로 그린 아치형의 무지개 그러데이션의 제목이 그려진 표지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전남친의 표정만 보고 난 캘리포니아의 금문교 쓰리디 도면이라도 그린 줄 알았다. 전남친은 워드 프로세서에 이런 멋진 기능이 있는지 몰랐다며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리포트 검토를 부탁했다. 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서강대교에서 금문교로 날아갈 것같이 아찔했다.  

1세대 포켓몬에는 ‘키우미집’이란 게 있다. 보육원에 알을 맡겨두고, 오랜 시간이 지나 알이 부화하면 포켓몬을 데리러 간다. 그래서 키우미집을 다시 찾아가면 모르는 포켓몬이 날 기다리고 있다. 엄마가 어린이집 가서 자기 애를 못 찾는 꼴이다.  

그렇다. 나는 전남친이 써야 하는 모든 리포트의 키우미집이었다. 하지만 키우미집 교사만큼이나 넓은 인내력을 가진 나조차도 영어 리포트의 모든 참고 문헌을 대신 달아달라는 부탁을 듣고 처음으로 뚜껑이 열렸다.  

아, 그때 헤어졌어야 했다. 나는 왜 헌신적이었는가. 왜 나는 헌신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했는가. 정작 나는 방 청소도 못 해서 어머니로부터 등짝을 처맞으면서, 페트병을 일반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구겨 넣다가 실수로 양심도 함께 내다버리신 전남친을 위해 자취방의 분리수거를 자처했는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5평 자취방의 페트병과 유리병을 보고 왜 난 신음하는 지구와 아마존의 눈물을 떠올렸는가….  

아아, 인류를 사랑하는 나는 지구도, 전남친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4년 전의 나야, 제발, STAY… 박애주의는 나가 죽었으면 좋겠다.

저는 1968년생, 05학번 엄마입니다

입상작
05학번 김선화

가난한 시골집에서 태어났으니까, 10남매 중에 넷째 딸이니까, 동생들 뒷바라지해야 되니까…. 내가 친구들과 다른 삶을 사는 데에는 수도 없이 많은 이유가 붙었다. 
 
내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나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등학교 졸업장은 따고 싶어서 아르바이트가 끝난 저녁 시간에 야간 수업을 들었다. 어른이 되면 달라질까 싶었는데 내 처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때에도 나는 친오빠네 가게 일을 도우며 용돈을 벌었다.  

그마저도 시골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생들에게 보내야 했다. 가난한 시골집에서 태어났으니까, 10남매 중에 넷째 딸이니까, 동생들 뒷바라지해야 되니까…. 내가 친구들과 다른 삶을 사는 데에는 수도 없이 많은 이유가 붙었다.  

한창 꾸미고 싶은 나이에 화장품 하나도 제대로 사보지 못하고 그렇게 내 20대가 지나갔다. 결혼해서 딸 하나, 아들 하나 낳고 정신없이 키우다 보니 어느새 마흔이 코앞이 됐다. 엄마로 사는 시간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계속 ‘내 삶은 어디에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 학원비에 보태려고 우유 배달도 해봤고 이런저런 일들을 조금씩 해봤지만 딱히 ‘내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으니 자신감도 없었다.  

그러던 중 방송통신대학교를 알게 됐다.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도 원하는 학과에 진학할 수 있다고 했다. 나에겐 ‘내 삶’을 살 수 있는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등록금도 비쌀 테고 4년이라는 긴 시간이 들기 때문에 고민이 됐다. 지원 마감 시간이 다가오는데 남편에게 말도 못 꺼내고 있을 때였다. 딸이 학교에서 ‘부모님이 원하는 자녀의 장래 희망’을 적는 가정통신문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나에게 “엄마는 꿈이 뭐였어?”라고 물었다.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라고 대답하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초등학생 때 장래 희망란에 ‘선생님’이라고 적었던 것이 생각났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설령 ‘썩은 동아줄’이더라도 잡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소년교육과에 입학했다. 막상 대학교에 입학은 했는데 이미 굳어버린 머리로 두꺼운 책을 읽는 게 쉽지는 않았다. 아들, 딸이 학원 숙제를 할 때, 옆에 앉은뱅이책상을 펼치고 앉아서 형광펜으로 열심히 밑줄 쳐가며 공부했다. 책값이 아까워서 중고 책을 찾아서 구매하고 다 공부한 책은 다른 사람에게 싸게 팔았다. 학점은 변변치 않았지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감사했다. 4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흘렀고, 마흔 한 살에 나도 ‘대졸’이 됐다. 청소년교육과를 졸업하니 어린이집에서 보육 교사로 일할 수 있게 됐다. 내 월급을 받고, 저축을 하고, 아들 딸 용돈을 넉넉하게 줄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 어릴 적 꿈이었던 ‘선생님’으로 불리며 살 수 있다는 게 가슴이 벅찼다.  

요새도 종종 딸이 얘기한다. “엄마가 그때 대학 갈 용기를 냈다는 게 지금도 너무 자랑스러워.”라고. 나도 2005년의 나를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한다. 2019년, 이제 쉰이 넘은 나이가 됐지만 앞으로도 나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904호 -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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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대학생#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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