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우리는 코로나가 갈라놓은 국제 커플입니다
한국에 도착했어야 할 애인은 티켓조차 끊지 못했다.
애인을 독일로 돌려보낸 지도 6개월이 넘었다.
“네가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네 애인이고 싶어.”라는 말을 작년 새해 첫날, 독일의 어느 밤거리에서 들었다. 그는 한 달 뒤 내 교환학생 생활이 끝나갈 때쯤, 비행기표를 출력해 보여주며 “네가 못 오면 내가 보러 갈게.”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지난해 6월과 12월, 정말로 날 위해 한국에 와주었다. 여름엔 최선을 다해 행복했다.
그러나 지난 겨울, 연달아 있는 크리스마스와 내 생일, 그리고 우리의 첫 기념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다시 한 번 11시간을 날아온 그의 앞에서 나는 자꾸 잠이 들었다. 겨울을 싫어하는데다 매일 피곤했던 나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애인의 숙소에서 보냈다. 그는 괜찮다고,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6개월 만에 만나, 고작 4주밖에 볼 수 없는 애인이 잠만 자는 게 달가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변명을 조금 하자면, 그때 나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일을 시작한 지 겨우 한 달이 넘은 신입 바리스타였다. 12시까지 마감 근무를 하고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우면 이미 새벽 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종일 잔뜩 긴장을 한 상태에서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다 보니 몇 시간을 자든 피곤함이 가시질 않았다. 함께 보려고 틀어놓은 크리스마스 영화가 다 끝난 뒤에야 겨우 일어나 ‘자기가 좋아할 만한 영화였어. 다음에, 자기 안 피곤할 때 다시 보자.’라는 말을 들었을 땐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잠을 참지 못하는 내가, 억지로라도 깨있을 수 있게 밖으로 나가지 않은 내가 너무 미웠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샷 추가 벤티 아메리카노를 매일 두 잔씩 들이켜서라도 깨어 있으려 노력했을까. 애인이 나에게 오는 것도, 내가 애인에게 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더라면.
윤해서의 소설 『암송』에는 등장인물인 모로와 루이가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라는 노래 가사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이 있다. 루이는 “모든 사랑에는 경계와 장애가 있지. 국경과 나이의 차이에서 생기는 어려움은 물론이고.”라고 말한다. 책을 처음 읽으며 밑줄을 그었을 때보다 지금 더 이 문장에 공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장거리 국제 연애가 힘들지 않냐 물어오면 “요즘 세상에 국경이 어디 있어요. 비행기 잘 다니고 영상 통화며 메신저며 얼마나 잘 되어있는데.”라고 답했다.
지금은 아니다. 비행기가 있어도 탈 수는 없다. 영상 통화를 하며 애인의 등 뒤 창문 밖은 밝고, 내 창문 밖은 어두컴컴하다는 걸 깨달을 때면 우리가 지금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만 더 뼈아프게 다가와 눈물이 난다. 지금 나와 애인의 사랑은 너무 어렵다. 매번 덤덤한 척해도 누군가 애인에 대해 물을 때면 울컥할 때가 있다. 대단하지도 않아 보이는 일로 싸우는 다른 커플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한다. 나는 싸우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어서 싸우지도 못하는데, 같이 있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 줄도 모르고 고작 그런 일로 싸워?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도 있다.
다음에 오면 더 잘해줘야지. 여름에 다시 오면, 가고 싶어 했던 광주에 데려가야지. 그때 좋아했던 티 카페의 새 코스를 체험하러 가야지. 겨우내 이런 다짐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기회는 이미 엎어져버렸다. 3주 전 한국에 도착했어야 할 애인은 티켓조차 끊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11월에 내가 독일에 가려던 계획만큼은 무산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나와 애인은 망한 현재보단 미래를 보려 노력한다. 매일 여행지 관련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함께 가고 싶은 곳을 찾아 서로를 태그하며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한다. 밤마다 페이스타임으로 ‘나’의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고, 언젠가 그것이 ‘우리’의 하루가 된다면 어떨지 상상해본다. 함께 먹고 싶은 음식, 함께 도전하고 싶은 액티비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불안은 어느새 녹아버리고 기대가 차오른다.
먼 거리나 직업 등 다양한 이유로 지금, 코로나 시대의 연애가 너무 버겁게 느껴지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란 걸 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지금 그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미래를 그려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지금의 어려움과 불안을 모두 견뎌낼 가치가 있는 사랑이라면 현재보다 더 선명한 미래가 떠오를 테니. 그 미래를 서로와 약속하면 된다. 나는 현재의 다짐과 노력만이 상상하는 미래를 불러낼 수 있고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약속한 것이 많은 이 연애를, 나는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다.
Writer 지성 sisbeauty@naver.com
26살, 연기할 각본이 없는 연애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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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인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대학내일은 20대를 보내는 여러분의 평범한 일상, 솔직한 목소리를 담고자 합니다.
“네가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네 애인이고 싶어.”라는 말을 작년 새해 첫날, 독일의 어느 밤거리에서 들었다. 그는 한 달 뒤 내 교환학생 생활이 끝나갈 때쯤, 비행기표를 출력해 보여주며 “네가 못 오면 내가 보러 갈게.”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지난해 6월과 12월, 정말로 날 위해 한국에 와주었다. 여름엔 최선을 다해 행복했다.
그러나 지난 겨울, 연달아 있는 크리스마스와 내 생일, 그리고 우리의 첫 기념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다시 한 번 11시간을 날아온 그의 앞에서 나는 자꾸 잠이 들었다. 겨울을 싫어하는데다 매일 피곤했던 나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애인의 숙소에서 보냈다. 그는 괜찮다고,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6개월 만에 만나, 고작 4주밖에 볼 수 없는 애인이 잠만 자는 게 달가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변명을 조금 하자면, 그때 나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일을 시작한 지 겨우 한 달이 넘은 신입 바리스타였다. 12시까지 마감 근무를 하고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우면 이미 새벽 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종일 잔뜩 긴장을 한 상태에서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다 보니 몇 시간을 자든 피곤함이 가시질 않았다. 함께 보려고 틀어놓은 크리스마스 영화가 다 끝난 뒤에야 겨우 일어나 ‘자기가 좋아할 만한 영화였어. 다음에, 자기 안 피곤할 때 다시 보자.’라는 말을 들었을 땐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잠을 참지 못하는 내가, 억지로라도 깨있을 수 있게 밖으로 나가지 않은 내가 너무 미웠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샷 추가 벤티 아메리카노를 매일 두 잔씩 들이켜서라도 깨어 있으려 노력했을까. 애인이 나에게 오는 것도, 내가 애인에게 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더라면.
윤해서의 소설 『암송』에는 등장인물인 모로와 루이가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라는 노래 가사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이 있다. 루이는 “모든 사랑에는 경계와 장애가 있지. 국경과 나이의 차이에서 생기는 어려움은 물론이고.”라고 말한다. 책을 처음 읽으며 밑줄을 그었을 때보다 지금 더 이 문장에 공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장거리 국제 연애가 힘들지 않냐 물어오면 “요즘 세상에 국경이 어디 있어요. 비행기 잘 다니고 영상 통화며 메신저며 얼마나 잘 되어있는데.”라고 답했다.

지금은 아니다. 비행기가 있어도 탈 수는 없다. 영상 통화를 하며 애인의 등 뒤 창문 밖은 밝고, 내 창문 밖은 어두컴컴하다는 걸 깨달을 때면 우리가 지금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만 더 뼈아프게 다가와 눈물이 난다. 지금 나와 애인의 사랑은 너무 어렵다. 매번 덤덤한 척해도 누군가 애인에 대해 물을 때면 울컥할 때가 있다. 대단하지도 않아 보이는 일로 싸우는 다른 커플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한다. 나는 싸우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어서 싸우지도 못하는데, 같이 있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 줄도 모르고 고작 그런 일로 싸워?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도 있다.
다음에 오면 더 잘해줘야지. 여름에 다시 오면, 가고 싶어 했던 광주에 데려가야지. 그때 좋아했던 티 카페의 새 코스를 체험하러 가야지. 겨우내 이런 다짐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기회는 이미 엎어져버렸다. 3주 전 한국에 도착했어야 할 애인은 티켓조차 끊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11월에 내가 독일에 가려던 계획만큼은 무산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나와 애인은 망한 현재보단 미래를 보려 노력한다. 매일 여행지 관련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함께 가고 싶은 곳을 찾아 서로를 태그하며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한다. 밤마다 페이스타임으로 ‘나’의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고, 언젠가 그것이 ‘우리’의 하루가 된다면 어떨지 상상해본다. 함께 먹고 싶은 음식, 함께 도전하고 싶은 액티비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불안은 어느새 녹아버리고 기대가 차오른다.
먼 거리나 직업 등 다양한 이유로 지금, 코로나 시대의 연애가 너무 버겁게 느껴지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란 걸 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지금 그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미래를 그려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지금의 어려움과 불안을 모두 견뎌낼 가치가 있는 사랑이라면 현재보다 더 선명한 미래가 떠오를 테니. 그 미래를 서로와 약속하면 된다. 나는 현재의 다짐과 노력만이 상상하는 미래를 불러낼 수 있고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약속한 것이 많은 이 연애를, 나는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다.
Writer 지성 sisbeauty@naver.com
26살, 연기할 각본이 없는 연애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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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인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대학내일은 20대를 보내는 여러분의 평범한 일상, 솔직한 목소리를 담고자 합니다.
#에세이#코로나#장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