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꽤나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던 우리는
‘꿈’의 실현이 아닌 또 다른 상실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야.” 평소 동경하던 선배가 이런 말을 건네왔다. 도대체 왜? 누가 봐도 멋진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던 그였던 만큼 쉽게 그 이유를 가늠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본인만의 길을 ‘마이웨이’로 개척해 나가던 사람이었다. 나 역시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공무원이 되는 정석 엘리트 코스를 밟는 것을 거부해 왔기에 그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뜻밖이었다. 어느정도 안정된 줄로만 알았던 그의 삶이 “공허하다”는 것이다.
돈과 명예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자보다 꿈을 이룬 자의 삶이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정작 꿈을 이룬 선배는 아직도 불안정하단다. 마치 ‘좋은 대학만 가면 살도 빠지고 애인도 생긴다’는 속설에 속았던 것처럼 또 다시 배신당한 기분이라나. 배부른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한 때 ‘청춘’이라는 달콤한 허상에 속아넘어갔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생각해보니 납득이 갔다. 그리고 그 사실이 왠지 모르게 분했다.
10대 시절 나는 푸르른 날들로 가득한 20대를 보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27살이 된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푸르렀던 날보다는 회색 빛을 띤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슬프게도 먹구름 낀 나날은 올 여름의 장마처럼 끈질기고 악착같이 현재진행중이다.
물론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젊음의 특권이라며 밤새 술을 마시고 강의에 결석하기도, 서툰 사랑이 힘들어 신촌 밤거리를 울며 걸어가기도 했으니 낭만이 없었다고 징징댈수는 없겠다.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진 데서 오는 외로움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다. 끝난 입시에 대한 해방감도 잠시, 현실적인 문제가 숨통을 조여온 것이다. 학점, 꿈, 취업, 그런 문제 말이다.
1920년대 대표 작가 중 하나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서문에는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의 사람들입니다(You are all a lost generation)”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후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단어는 세계 1차대전 이후 오는 환멸과 상실감, 무력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던 젊은 세대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그런데 그 단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옆 나라 일본의 이야기다. 그들 사이에서는 1993년부터 2004년, 거품경제가 폭발한 이후의 불황기에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을 그렇게 칭했다. 현재 일본의 취업난은 나아졌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반대다. 가뜩이나 얼어붙었던 취업시장은 코로나19를 계기로 더욱 경직되었다. 현재의 우리야말로 그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된 셈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해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서 연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선배의 경우만 봐도 원하는 직업을 가진다고 해서 그 상실감이 해소되지는 않나보다. 대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우린 보통 꿈이 뭐냐는 질문에는 직업을 답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직업을 가져 보니 일터는 자아실현을 하고 꿈을 이루는 공간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직장은 내 노동에 대한 돈을 지불하고 나는 그에 걸맞게 회사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존재이니 사실 어쩔 수 없는 셈이다. 이때문에 결국 자아실현은 노동해서 번 돈으로 해야한다는 웃지 못할 농담도 생기지 않았는가. 끊임없이 경쟁하여 달려온 곳의 종착역에는 ‘꿈’의 실현이 아닌 또 다른 상실감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2014년 방영된 나영석PD의 <꽃보다 누나>에서 “승기와 같은 청춘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물음에 윤여정 선생님은 “안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젊음”을 “무모한 시절”이자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지 않았던 시절로 추억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이유 모를 위안을 얻었다. 청춘이 마냥 빛나기만 하는 시절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그 시기를 직접 겪으며 깨달았지만, 당시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젊음을 낭비한다는 느낌을 받아왔던 터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원하던 대학의 합격통지표를 받고 기뻐하던 순간이 아직 생생하다. 그 때의 내가 그리던 20대 중후반의 내 모습은 현재의 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남들이 봤을 때 나는 하루하루 살아가기 빠듯한 ‘로스트 제너레이션’일 뿐. 결국 나도, 자신만의 삶을 향유하고 있는 줄 알았던 선배도 아직 멋진 어른이 되지는 못한 채 어쩌면 이렇게 얼마 남지 않은 20대를 흘려 보낼지도 모르겠다.
왠지 ‘청춘’이라는 멋들어진 포장지에 속아 공허함, 상실감을 떠안았다는 속은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 삶도 그런대로 흘러가겠지. 멋진 어른이 되지 않으면 어떤가. 단 한 번, 단 하나뿐인 나만의 인생을 그럴듯하게 개척해오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Writer 문혜준
졸업 후 잡지사에서 일하며 고민하고 도전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에세이 기고 안내]
‘쓸 만한 인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대학내일은 20대를 보내는 여러분의 평범한 일상, 솔직한 목소리를 담고자 합니다.
돈과 명예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자보다 꿈을 이룬 자의 삶이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정작 꿈을 이룬 선배는 아직도 불안정하단다. 마치 ‘좋은 대학만 가면 살도 빠지고 애인도 생긴다’는 속설에 속았던 것처럼 또 다시 배신당한 기분이라나. 배부른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한 때 ‘청춘’이라는 달콤한 허상에 속아넘어갔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생각해보니 납득이 갔다. 그리고 그 사실이 왠지 모르게 분했다.
10대 시절 나는 푸르른 날들로 가득한 20대를 보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27살이 된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푸르렀던 날보다는 회색 빛을 띤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슬프게도 먹구름 낀 나날은 올 여름의 장마처럼 끈질기고 악착같이 현재진행중이다.
물론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젊음의 특권이라며 밤새 술을 마시고 강의에 결석하기도, 서툰 사랑이 힘들어 신촌 밤거리를 울며 걸어가기도 했으니 낭만이 없었다고 징징댈수는 없겠다.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진 데서 오는 외로움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다. 끝난 입시에 대한 해방감도 잠시, 현실적인 문제가 숨통을 조여온 것이다. 학점, 꿈, 취업, 그런 문제 말이다.
1920년대 대표 작가 중 하나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서문에는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의 사람들입니다(You are all a lost generation)”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후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단어는 세계 1차대전 이후 오는 환멸과 상실감, 무력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던 젊은 세대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그런데 그 단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옆 나라 일본의 이야기다. 그들 사이에서는 1993년부터 2004년, 거품경제가 폭발한 이후의 불황기에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을 그렇게 칭했다. 현재 일본의 취업난은 나아졌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반대다. 가뜩이나 얼어붙었던 취업시장은 코로나19를 계기로 더욱 경직되었다. 현재의 우리야말로 그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된 셈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해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서 연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선배의 경우만 봐도 원하는 직업을 가진다고 해서 그 상실감이 해소되지는 않나보다. 대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우린 보통 꿈이 뭐냐는 질문에는 직업을 답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직업을 가져 보니 일터는 자아실현을 하고 꿈을 이루는 공간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직장은 내 노동에 대한 돈을 지불하고 나는 그에 걸맞게 회사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존재이니 사실 어쩔 수 없는 셈이다. 이때문에 결국 자아실현은 노동해서 번 돈으로 해야한다는 웃지 못할 농담도 생기지 않았는가. 끊임없이 경쟁하여 달려온 곳의 종착역에는 ‘꿈’의 실현이 아닌 또 다른 상실감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2014년 방영된 나영석PD의 <꽃보다 누나>에서 “승기와 같은 청춘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물음에 윤여정 선생님은 “안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젊음”을 “무모한 시절”이자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지 않았던 시절로 추억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이유 모를 위안을 얻었다. 청춘이 마냥 빛나기만 하는 시절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그 시기를 직접 겪으며 깨달았지만, 당시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젊음을 낭비한다는 느낌을 받아왔던 터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원하던 대학의 합격통지표를 받고 기뻐하던 순간이 아직 생생하다. 그 때의 내가 그리던 20대 중후반의 내 모습은 현재의 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남들이 봤을 때 나는 하루하루 살아가기 빠듯한 ‘로스트 제너레이션’일 뿐. 결국 나도, 자신만의 삶을 향유하고 있는 줄 알았던 선배도 아직 멋진 어른이 되지는 못한 채 어쩌면 이렇게 얼마 남지 않은 20대를 흘려 보낼지도 모르겠다.
왠지 ‘청춘’이라는 멋들어진 포장지에 속아 공허함, 상실감을 떠안았다는 속은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 삶도 그런대로 흘러가겠지. 멋진 어른이 되지 않으면 어떤가. 단 한 번, 단 하나뿐인 나만의 인생을 그럴듯하게 개척해오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Writer 문혜준
졸업 후 잡지사에서 일하며 고민하고 도전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에세이 기고 안내]
‘쓸 만한 인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대학내일은 20대를 보내는 여러분의 평범한 일상, 솔직한 목소리를 담고자 합니다.
#20's voice#에세이#상실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