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어느 순간 나는 막 대해도 되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100을 주면 우리 관계가 150이 될 것이라 믿었는데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명절에 내가 사촌과 싸울 때면 절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누가 봐도 상대방이 잘못한 상황에서도, 딸이 억울한 편에 있어도, 지는 게 이기는 법이라며 그냥 참고 무시하라고 나를 달랬다. 아끼는 물건을 두고 사촌과 경쟁할 때도 항상 양보를 종용 받았다. 그렇게 수년간 자라온 탓인지, 나는 지금도 남에게 주는 게 더 좋고 양보하는 게 편하다.  

성인이 된 지금, 나를 위해 소비하는 건 그다지 큰 효용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건 아직도 기분이 좋다. 내가 그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주는 데서 더 큰 행복을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여행을 갔다 오면 항상 뭐라도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그 탓에 귀국길엔 항상 짐이 한 가득이었다.  

100을 주면 우리의 관계가 150이 될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친구가 명백하게 나한테 잘못을 저질렀어도, 친구가 미안해할까 봐 오히려 내가 더 절절맸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친구가 가르치듯이 설명해줘도, 친구의 기분을 생각해 그냥 모르는 척 한 적도 숱하게 많다. 대화가 어긋나 싸울 기미가 보이면, 바로 잘못 생각했다며 사과했다. 싸우느니 그냥 바보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사실 일상에 가까운 이런 일들에 딱히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이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또 편했으니까. 아무한테나 이러는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무 퍼주지 말라고, 호구짓 하지 말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호구가 어때서? 착한 건 좋은 거 아닌가?’ 하면서 그런 말들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건넨 100은 절대 150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60, 70으로 깎여 돌아왔다. 어느 순간 나는 막 대해도 되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몇몇은 내가 하는 양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걸 이용해먹으려 했다. 밥을 먹고 내가 계산을 하면, 그 후부턴 내가 계산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편한 걸 넘어 다른 친구에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례한 행동도 내게는 서슴없이 했다. 묘하게 나를 디스하는 말밖에 안 해서 원래 그런 성격인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한텐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기도 했다.  
  
사람이 만만해지는 건 끝이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나는 항상 2등 친구였다. 나와 한 약속은 미뤄지거나 지켜지지 않기 일쑤였다. 누군가에게 나는 만날 사람이 없을 때만 만나는 보험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나와 암묵적인 약속을 했음에도 일언반구 없이 다른 사람에게 가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게 하는 친구도 있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내가 걸레질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친구가 말했다. “우리 엄마가 사람은 배우면 그걸 반드시 써먹게 되어 있다고, 이런 집안일은 일부러 안 가르쳤어.” 그런 말을 듣고도 항변은커녕 맞장구까지 치던 게 나였다.  

어느 순간,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인간관계를 복기해본 끝에 내린 결론은, 관계에서 스스로 호구가 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거였다. 양보와 배려는 절대 선善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해오던 행동들도 나 편하자고 한 거지, 남을 위해 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이런 취급과 대우를 자처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하나. 속상함을 느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말을 해야 한다.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동안 속상했던 여러 일들을 당사자에게 털어놓진 않았다. 내 과실도 있었고, 갑자기 불만을 토로하면 상대방의 입장에선 급발진처럼 보일 것 같아서였다. 대신 더 이상 예전 같은 관계는 맺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건 이 관계가 발전하느냐 악화되느냐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쪽의 일방적인 양보로 지탱되는 관계는 더 이상 맺지 않으리라는 다짐이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란 건 없기 때문에. 그 관계가 아니어도 나는 멀쩡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이젠 힘을 좀 빼기로 했다.  

이 모든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세심한 배려와 양보를 베푸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내 주변엔 많다. 티 안 나게,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의, 어찌 보면 가장 수준 높은 배려. 공기처럼 사소하지만 없으면 안 되는 그런 배려. 그런 마음은 끝없는 사유와 자기성찰을 거쳐 나온 결과란 걸 잘 안다. 이젠 나도 딱 그만큼을 배우고 싶다. 아직은 배려와 호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젠 호구를 자처하는 게 절대 착한 게 아니란 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Writer 호구의 종말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많아서 피곤하게 살고 있는 22살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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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인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대학내일은 20대를 보내는 여러분의 평범한 일상, 솔직한 목소리를 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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