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지금 누군가에게 서운하다면 읽어보세요
나는 네 생일에 좋은 선물해줬는데 이게 끝이라니.
‘어제 생일이었네? 생일 축하해! (하트 이모티콘)’
서운함은 조용하게 시작해서 크게 번진다. 가끔은 알아서 사그라지기도 하지만, ‘이게 서운해도 될 만한 일인가?’ 하는 자기 검열에서 ‘그렇다’는 결론에 이르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그렇다고 서운함을 매번 표현하기는 힘들다. 스포츠 경기처럼 누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판정해주는 심판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탓에 말이 혀끝을 맴돈다.
메신저에 내 생일인 거 떴을 텐데 모르는 게 말이 되냐? (너무 공격적으로 느껴지려나?)
나는 네 생일 때 좋은 선물해줬는데 이게 끝이라니. (쪼잔한 사람 같지는 않을까?)
내가 말하기 전에는 먼저 만나자는 말은 절대 안 하네. (연인 관계도 아닌데 너무 집착 같나?)
소심러가 아니라도 이런 복합적인 생각 앞에서 할 말을 고르는 건 쉽지 않다. 서운함을 섣부르게 토로한 뒤 머쓱해지는 경우가 많아서 더 그렇다. 상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네가 잘못한 건지 아니면 내가 옹졸한 건지 헷갈리는 순간, 서운함은 관계에 대한 현타로 바뀌곤 한다.
그렇다고 서운함을 느끼게 하는 상대가 늘 잘못한 것도 아니다. 가끔 우리는 더 사랑받고 싶어서 상대에게 무언가를 계속해서 갈구하곤 하는데, 그렇게 발생하는 서운함에는 사실 가해자가 없다. ‘내 기대만큼 나를 신경 써주지 않아서 속상해!’라는 말을 문장 그대로 전하는 건 자존심이 상해서 그냥 ‘서운해’라는 단어로 퉁 칠 때가 있는데 그러면 상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평소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있던 상대라면 더욱 그렇다. 그저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인데 애정을 의심받으니 썩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 내 생일을 축하해서 서운함을 느끼게 했던 친구는 힘든 일이 생긴 나에게 두말없이 달려 와줬다. 친구가 사주는 위로의 술을 마시며 솔직히 그때 서운했다고 말하자 친구는 “야, 안주 하나 더 시켜!”를 외쳤다. 인터넷에 연인이나 친구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는 글이 올라오면, 댓글에 달리는 해결책은 대개 빠른 손절이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에게 더 집중하라는 말은 백 번 들어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 그동안 나를 손절하지 않아준 관대한 사람들 덕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쁜 연인과 헤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두둔하던 바보 같은 내 손을 놓지 않아준 친구 덕에 나는 잘 이별하는 법을 배웠다. 자기혐오에 빠졌던 취준생 시절, 부정적인 말만 쏟아내던 나에게 끝없는 위로를 보내줬던 친구 덕분에 그 시간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친구는 지금도 종종 그때의 나를 놀리곤 한다.)
그래서 나는 서운함을 되도록 서운함에서 끝내려 노력한다. 혼자 서운함을 발전시켜 상대를 미워하지 않도록, 가볍게 감정을 토로하고 빠르게 잊어버린다. 아마 옹졸한 나는 앞으로도 덤덤하고 관대한 사람은 못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적어도 주변 사람을 쉽게 놓아버리는 사람은 되지 않으려 한다. 날 잡아준 다정한 손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친구와 연인의 손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Writer 고사리
25세. 연애 중입니다, 행복하고요.
서운함은 조용하게 시작해서 크게 번진다. 가끔은 알아서 사그라지기도 하지만, ‘이게 서운해도 될 만한 일인가?’ 하는 자기 검열에서 ‘그렇다’는 결론에 이르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그렇다고 서운함을 매번 표현하기는 힘들다. 스포츠 경기처럼 누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판정해주는 심판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탓에 말이 혀끝을 맴돈다.
메신저에 내 생일인 거 떴을 텐데 모르는 게 말이 되냐? (너무 공격적으로 느껴지려나?)
나는 네 생일 때 좋은 선물해줬는데 이게 끝이라니. (쪼잔한 사람 같지는 않을까?)
내가 말하기 전에는 먼저 만나자는 말은 절대 안 하네. (연인 관계도 아닌데 너무 집착 같나?)
소심러가 아니라도 이런 복합적인 생각 앞에서 할 말을 고르는 건 쉽지 않다. 서운함을 섣부르게 토로한 뒤 머쓱해지는 경우가 많아서 더 그렇다. 상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네가 잘못한 건지 아니면 내가 옹졸한 건지 헷갈리는 순간, 서운함은 관계에 대한 현타로 바뀌곤 한다.
그렇다고 서운함을 느끼게 하는 상대가 늘 잘못한 것도 아니다. 가끔 우리는 더 사랑받고 싶어서 상대에게 무언가를 계속해서 갈구하곤 하는데, 그렇게 발생하는 서운함에는 사실 가해자가 없다. ‘내 기대만큼 나를 신경 써주지 않아서 속상해!’라는 말을 문장 그대로 전하는 건 자존심이 상해서 그냥 ‘서운해’라는 단어로 퉁 칠 때가 있는데 그러면 상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평소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있던 상대라면 더욱 그렇다. 그저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인데 애정을 의심받으니 썩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 내 생일을 축하해서 서운함을 느끼게 했던 친구는 힘든 일이 생긴 나에게 두말없이 달려 와줬다. 친구가 사주는 위로의 술을 마시며 솔직히 그때 서운했다고 말하자 친구는 “야, 안주 하나 더 시켜!”를 외쳤다. 인터넷에 연인이나 친구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는 글이 올라오면, 댓글에 달리는 해결책은 대개 빠른 손절이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에게 더 집중하라는 말은 백 번 들어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 그동안 나를 손절하지 않아준 관대한 사람들 덕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쁜 연인과 헤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두둔하던 바보 같은 내 손을 놓지 않아준 친구 덕에 나는 잘 이별하는 법을 배웠다. 자기혐오에 빠졌던 취준생 시절, 부정적인 말만 쏟아내던 나에게 끝없는 위로를 보내줬던 친구 덕분에 그 시간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친구는 지금도 종종 그때의 나를 놀리곤 한다.)
그래서 나는 서운함을 되도록 서운함에서 끝내려 노력한다. 혼자 서운함을 발전시켜 상대를 미워하지 않도록, 가볍게 감정을 토로하고 빠르게 잊어버린다. 아마 옹졸한 나는 앞으로도 덤덤하고 관대한 사람은 못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적어도 주변 사람을 쉽게 놓아버리는 사람은 되지 않으려 한다. 날 잡아준 다정한 손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친구와 연인의 손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Writer 고사리
25세. 연애 중입니다, 행복하고요.
#생일#친구#인간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