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나부터 사랑이 넘쳐야 상대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영화 10편 중 9편이 로맨틱 코미디인 나는, 스크린이 아닌 현실에서 만난 명장면 같은 기억이 있다. ‘아! 저 모습이 내가 원하는 진짜 연애의 모습이다!’ 싶은 장면 말이다.  

고등학생 때 하교길은 우리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벚꽃 명소였다. 봄이면 개천을 따라 늘어선 벚꽃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따뜻한 햇살을 머금은 봄바람에 사람 마음도 괜히 들뜨는데, 학업에 지친 고등학생에게는 그 여파가 어마어마했다.  

수업이 끝나고 오랜만에 느릿느릿 벚꽃 구경을 하다가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톤이 비슷한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키 차이가 두 뼘 정도 나는 남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그 주위로 분홍빛 몽글거림이 피어 오르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아니, 정말로 보였다.  

꼭 붙어 있던 것도 손을 잡은 것도 아니라, 연인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이미 인연은 시작된 듯한 두 사람의 뒷모습이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던 나는 꿈을 꾸게 되었다. “나도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될 때면, 어른이 되면, 대학생이 되면! 이 명장면에서 오늘처럼 행인이 아니라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나는 삼수를 하게 됐다. 여중, 여고를 나온 내게 재수학원은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이성을 오랜 시간 마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만 재수학원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성교제는 엄격하게 제한됐다. 같은 반 남학생과 여학생이 연애를 했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자리가 깨끗이 비워질 정도였다. 금사빠였던 나는 그런 식으로 학원에서 쫓겨나는 게 무서워 이성 보기를 돌같이 하며 공부하다가 대학에 갔다.  

대학에 온 나의 세계는 물에 퍼지는 물감 한 방울 마냥 급격히 넓어졌다. 그 속도를 감당하기 어려워 아직도 따라잡는 중이다. 남들보다 더 길었던 수험생활은 나의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는데, 그 중 가장 큰 변화를 맞은 건 성격이었다. 원래도 활발한 성격은 아니었던 나는 더욱 내성적인 사람이 됐다. 설레는 마음을 품고 반짝이는 눈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하기에 나는 이미 너덜너덜한 새내기였다. 인간관계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지금의 내게 연애는 사치일 뿐이다. 이 글은 내가 연애를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자 공개 고백이다.  

사실 나는 어려운 사람이 아니다. 친구가 걱정할 정도로 금사빠에 얼빠라는 최악의 조건을 가졌기에 ‘철벽’이라는 옹성으로 날 보호하고 있을 뿐이다. 어릴 적 귀여웠던 풋사랑을 품던 나, 아이돌에 푹 빠졌던 팬으로서의 나, 과몰입력 200%를 자랑하는 로코매니아인 나. 나는 매번 사랑에 빠져 있었고 퍼 주기만 했다. 수험생활을 거친 뒤 왠지 스스로 잃어버린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사랑을 퍼주는 대상을 나로 잠시 돌렸을 뿐이다.  

나부터 사랑이 넘쳐야 나도 지키고, 사랑하는 상대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매일같이 조금씩 나아지려고 노력하며 용기를 내는 중이다. 옆자리를 반질반질 닦아 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와서 앉기만 해라. 그렇게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Writer 백가윤
마음에 찰랑였던 찰나를 글로써 기록합니다.
#20's voice#대학생에세이#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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