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서울의 봄>을 보며 알아두면 좋을 9가지 역사적 사실
'역사 그 자체가 스포일러'라지만, 그 역사를 알아야…
영화 <서울의 봄>이 화제다. 관객 수 527만 명을 확보하며 손익분기점은 진즉에 넘겼다. 배우들의 호연과 훌륭한 연출로 12.12 사태를 140분 안에 꾹꾹 눌러 담은 결과다. '역사 그 자체가 스포일러'라지만, 반대로 역사를 알아야 스포일러다. 그래서 영화를 보기 전, 혹은 보고 난 후 이해를 도와줄 역사적 사실을 모았다.

하나회는 사실상 당시 대한민국 군 내부에서 ‘박정희 친위대’의 성격을 띤 조직이었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전두환(당시 대위)이 박정희로부터 국회의원 출마 권유를 받자 “각하, 군 내부에도 각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로 거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최규하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였으며, 10.26사태 이후 대한민국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원래대로라면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 26일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전두환의 쿠데타로 재임 8개월만인 1980년 8월 16일 축출된다.

대한민국이 북한에게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된 시점은 1980년대 이후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 사태는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기에, 이 시기 군 수뇌부는 실제로 북의 남침 위협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각 부대 지휘관들이 병력을 수도권으로 쉽사리 이동시키지 못한 이유다.

최규하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도 “새 헌법을 마련하고 나면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퇴임하겠다”고 할 정도로 권력에 관심이 없었다. 권한 대행 과정에서 군 통제권을 장악하려 ‘전국 계엄령’을 내리지 않고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 계엄령’을 내린 이유다. 이 때문에 12.12 사태 당시 실질적인 군 통제권은 국방장관이었던 노재현에게 있었다.

다만 국방장관 노재현이 부대이동을 지시하려면 대통령 혹은 한미연합사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한미연합사를 찾은 것인데, 동의를 얻지 못하고 반란군에게 붙잡힌 것. 어쨌든 그가 정승화 총장 체포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장태완에게 무장해제할 것을 종용한 것은 사실이다.

참모차장 윤성민은 반란군에 체포되자마자 풀려나 노재현 국방장관과 하나회가 모인 보안사령부로 소환되어 전두환에게 회유된다. 이후 윤성민은 1982년 5월부터 1986년 1월까지 전두환 정권 최장수 국방부장관을 지낸다.

최규하 대통령은 참모총장 정승화 체포 동의서에 서명하며 재가 날짜와 시간(12.13. AM 05:10)을 적었다고 주장해 왔다. 반란군 측이 선 조치(체포) 후 재가를 시도했다는, 불법 행위였음을 증거로 남기기 위한 조치였다. 다만 당시 신군부가 펴낸 비밀책자 <5공 전사> 속 문건에 담긴 실제 체포 동의서 사본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물론 편찬 과정에서 조작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당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레임덕이기도 했지만, 박정희의 유신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에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외치며 자체 미사일 개발을 추진해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전두환은 이를 인지하고 레이건 정권에게 우호적인 친미정책을 펼쳤으며, 미국의 별다른 개입 없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병주 사령관을 호위하다 사망한 김오랑 비서실장의 시신은 해당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되었다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이장되었다. 정병주 사령관은 1988년 10월 행방불명된 이후 실종 4개월만에 목매달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생전에 자식들에게 “내가 죽은 후에도 김오랑 묘소에 참배를 하라”는 말을 남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