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방학을 방학답게 보냈던 초등학생처럼 살아보았다.

'조금 숨을 골라도 괜찮아.'
몰아치는 학교 과제와 몸을 압박해 오는 '취업'이란 거대한 장벽, 불안정인 미래와 낮은 취업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무언가를 계속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이 매일 드는 8월 여름방학이다.

형체 없는 불안이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이런 불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리포터에게 하루 휴가를 주기로 결심했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마음껏 보고, 작은 일 하나에도 가슴이 쉽게 들뜨던, '방학'을 정말 '방학'답게 보냈던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하루를 살아보기로.



⏰ 사망년의 여름방학 생활계획표


현재 리포터의 방학 생활은 대강 이렇다. 잘못된 습관으로 밤낮이 바뀌어 새벽 5시에 잠들어 1시에 일어나는 삶. 과 취업 준비를 위한 작고 소중한 노력과, '문예 창작‘ 전공을 살려보기 위한 소설 습작까지. 일과를 끝낸 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조금 두려워진다. 나름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미래가 칠흑 같은 어둠처럼 깜깜할까 봐.

"이랬는데 요래됐습니다."

⏰ 초등학생이 된 리포터의 생활 계획표


조금 어두침침하고 어딘지 우울한 생활 계획표를 다시 짜보았다. 오늘 하루만큼은 이런저런 걱정을 내려놓고, 초등학생처럼 마음 편하게 살아보자.



💤 아침 8시 30분 ~ 11시 00분 


밤낮을 바꿔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리포터. 오랜만에 아침을 먹으려니 속이 더부룩해 잘 들어가지 않는다. 꾸역꾸역 아침을 먹고, 양치까지 마친 뒤 책상 위에 앉았다.

초등학생 시절, 리포터의 엄마는 아침마다 리포터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나 당부 사항을 쪽지로 적어 손에 쥐여주곤 했다. SNS 메신저가 지금처럼 잘 쓰이지 않았기에 가능한 낭만이었다. 이런 편지들을 파란색 상자에 차곡차곡 보관해 왔다.

밤낮이 바뀐 이후, 해야 할 일을 달력에 기록해 놓아도 자꾸 까먹거나 놓친다. 일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의 자괴감도 상당하다. 하지만 모든 일을 스스로 해내야 하는 성인이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 없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기에 그리웠다. 삶의 방향을 친절하게 알려주던 엄마의 쪽지가.


진심을 전달하는 일은 언제 해도 부끄럽고 어려운 일이기에 편지를 적는 일 대신, 손때 묻은 편지를 엄마와 함께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엄마의 글씨체가 뭉클하다.



📺 점심 11시 30분 ~ 12시 30분


평소 같으면 아직 잠을 자고 있거나 겨우겨우 일어나 휴대폰을 뒤적거릴 시간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투니버스 황금기'라고 불렸던 2010년. 좋아하는 만화는 대부분 늦은 시간대에 방영했고, 재방송을 보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야만 하니까.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티비를 보고 있으니 가슴 한구석이 조금은 무거워진다. 방학동안 할 일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 스크롤을 넘기며 시간을 보냈었다.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고 있는 동안 남들은 나를 앞서 나갈 것을 알면서도 휴대폰을 내려놓기 힘들었다. 분명 몸은 쉬는데, 마음은 불편했다.

오늘만큼은 괜한 죄책감을 지우고 작은 티비 화면에 집중했다. 아무 걱정 없는 온전한 휴식 시간이 달콤하다.


달빛천사, 슈가슈가룬, 캐릭캐릭체인지, 라라의 스타일기, 아이엠스타, 프리즘 스톤. '아이돌'이란 높고 허망된 꿈을 품게 만들었던 꿈의 보석 프리즘 스톤의 노래도 오랜만에 들어봤다.

'바보 같던 어제의 나는 이제 Bye Bye, 꿈꿔 온 미래를 향해, 밝은 내일로 Hello!'

어릴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던 노래인데, 이제는 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위안을 받는다.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육중하게 가슴을 울린다.



📚 오후 12시 30분 ~ 1시 30분



평소라면 한창 폰을 뒤적거리며 인스타그램 릴스를 내리고 있을 시각. 새로 짠 계획표를 따라 책을 들었다. SNS가 발달하지 않았을 시절, 우리에게 훈녀 생정을 알려주었던 '스마트 걸' 시리즈.

어릴 때는 책을 읽는 게 마냥 즐거웠다. 아무 생각 없이 책 속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부턴 책 읽는 게 괜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마음 편히 독서할 만큼의 심적 여유가 없어서일까. 책을 읽는 것이 취미가 아닌 하나의 일처럼 느껴졌다. 평소 가지고 있던 부담감을 내려놓고 천천히 책을 펼쳤다. 글자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따라 읽었다.


챕터 중간중간에는 주변의 것을 활용하여 생활에 유용한 물품을 만들 수 있는 DIY 레시피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레시피를 보며 꼭 만들어야겠다고 불타오르다가도, 책을 덮은 뒤에는 없는 일이 되곤 했었지.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일이지 않을까.

책을 다 읽으니 마음이 조금 산뜻해졌다. 이런 감각을 잊지 않고 앞으로 독서할 때 적용하리라 마음먹었다.


 
📝 오후 1시 30분 ~ 4시 00분


포토샵 자격증 취득을 위해 마우스를 뒤적거리며 실습할 시간, 책장을 뒤적거려 옛날에 했던 학습지들을 찾아 꺼냈다. 국어, 수학, 영어, 독서 논술 등등 다양한 '씽크빅'의 학습지를 했었고, 많은 학습지를 푼다는 것에 꽤 자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부가 별로 재미없다. 그때는 공부가 하나의 놀이였고, 지금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일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천천히 수학 문제를 풀었다. 문제가 너무나도 쉽게 느껴지는 것은 퍼즐 풀듯 차근차근 문제를 풀던 어린시절의 내가 있어서겠지.

자격증을 공부하는 동안 진도를 따라가기에 급급했었다. 빨리 취득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조금 화가 났다. 자격증뿐 아니라 학교 진도나 과제도 마찬가지였다. 열 손가락을 다 동원해 문제를 천천히 풀어나간 그 시절처럼, 조금 멈춰 서 다시 한번 해 보면 되었는데 말이다. 그때의 여유로움과 느긋함을 곱씹으며, 모든 일을 차근차근 도전해 보기로 했다.



🗽 오후 4시 00분 ~ 6시 00분


열심히 공부 했으니 자유시간을 주기로 한다. 선풍기를 켠 뒤 침대에 벌러덩 누워 닌텐도 DS를 들었다. 전원 버튼을 켜자마자 '디딩' 하는 경쾌한 알림음과 경고 화면이 뜬다.

어릴 때는 '건강과 안전을 위하여' 라고 적힌 경고 문구가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오랜만에 접속하니 새 이웃이 이사와 있었다. 기존에 있던 이웃 중 한 명이 말도 없이 이사를 가 버린 것이다. 이사 가 버린 주민은 다신 만날 수 없다고 한다. 데이터가 삭제되서일까. 예고 없는 이별은 예나 지금이나 아프다.



📄 오후 6시 00분 ~ 8시 00분


놀았으니 이제는 과제를 할 시간.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써 보았을 '일기'다. 평소 같으면 컴퓨터의 딱딱한 글씨체를 바라보며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를 고칠 시간이지만, 오늘은 둥글둥글한 손 글씨를 보기로 한다.


초등학생 때는 눈을 크고 반짝거리게 그리고 턱을 뾰족하게 만드는 게 그림을 잘 그리는 법칙이었다. 지금 초등학생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보는 순정 만화 st 그림체가 반가웠다.

일기를 죽 넘겨보았다. 평범한 일상들의 반복이었지만, 재미있었다. SNS를 통해 타인의 삶을 관음하며 남몰래 부러워하던 나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일상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소중히 간직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태도를 배워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 오후 8시 00분 ~ 9시 30분


느긋하게 밥을 먹은 뒤 다시 책상에 앉거나 휴대폰을 볼 시간이지만, 오늘은 조금 일찍 침대에 누워보기로 한다. 취침 시간은 저녁 9시 30분. 그전까지 주어진 자유시간을 즐긴다.

무엇을 할까, 책장을 뒤적거리다 한때 즐겁게 보았던 만화책을 꺼내 들었다. 알 사람은 알 것 같은 캔디 북 시리즈. 다른 만화책보다 크기가 작고 컴팩트 하여 꽤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화책을 펼치자 오래 전 친구가 되어주었던 캐릭터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만화책 주인공처럼 하고 싶은 일도 다 이루고, 멋있는 남자 친구도 사귀는 당당한 여자가 되리라고 다짐했었는데. 현실은 알바와 대외활동 연속 불합격에, 집에서 혼자 머리나 벅벅 긁는 신세다.

꿈꿨던 미래의 나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지금의 나도 미래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으니 사과는 하지 않는다.



바라는 게 많은 초등학생의 리포터.

하루 동안 초등학생의 삶을 살아보니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내'가 그리워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리고 과거의 내가 모여 현재의 '내'가 '학생 리포터 활동' 등 유의미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의 '내'가 조금씩 모여 조금 더 나아진 미래의 '나'를 완성하리란 것.

아무 걱정 없이 산 오늘은 내일이 되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테지만, 미련은 갖지 않기로 했다. 내일의 나는 분명 미래의 나를 더 나은 삶으로 만들 테니까.

대학생은 성인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청소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나이다. 하지만 학생과 다르게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서툴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당신. 오늘 하루만큼은 모든 게 느렸던 초등학생처럼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천천히 숨을 골라보는 것은 어떨까.


#초등학생#여름방학생활#리와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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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지원
2025.08.12 01:07
선풍기 앞에서 눈높이 풀던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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