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방식이 전공이 되었을 때
처음엔 그저 졸업하려고 듣는 수업인 줄 알았지만 과제와 팀플, 발표와 시험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세상을 보는 방식까지 달라져 버렸다. 친구와 대화할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전공이 눈치 없이 끼어든다.
이쯤 되면 학비 내고 학문이 아니라 만성 질환을 얻은 게 분명하다. 그래서 물어봤다.
"혹시 당신도 전공병에 걸렸나요?"
강의실 밖에서도 전공에 절여져 사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피카츄는 전압원일까, 커패시터일까."

한도연, 고려대학교 전기전자공학부 25학번
누군가에게는 황당한 질문이겠지만, 전기전자공학부 학생들 사이에서 피카츄는 충분히 진지한 토론 주제다. 최근 동기들과 피카츄의 정체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는 도연씨. 그녀는 자신의 전공병을 '일상생활 전공 과몰입 강박증'이라고 정의했다.
아직 2학년이라 전공을 엄청 깊게 아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일상에서도 아는 단위가 보이면 눈길이 먼저 가요. 예전에는 보조배터리나 고데기를 살 때 디자인만 봤다면, 이제는 상세페이지에 W, A, V 같은 단위가 보이면 한 번 더 스펙을 따져보게 되더라고요.
가끔 친구들이 "이거 사도 돼?" 하고 물어보면 나름 전전생이라고 아는 척하면서 골라주기도 하는데요. 정작 전공 시험 점수를 생각하면 조금 양심이 찔리기도 합니다 (웃음).
최근에 과 동기랑 피카츄의 정체를 두고 엄청 진지하게 토론한 적이 있어요. 피카츄는 백만 볼트를 쏘니까 전압원이라는 주장도 있었고, 기술을 쓰면 방전되니까 커패시터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피카츄를 병렬 연결하면 어떻게 될까?", "백만 볼트면 피카츄 한 마리로 집 전력 공급도 가능한 거 아니야?" 같은 이야기까지 이어졌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포켓몬 한 마리를 두고 그렇게 열심히 분석하고 있었다는 게 좀 웃기긴 한데, 그때 진짜 "우리 전공병 제대로 왔구나" 싶었습니다.
피카츄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사실 저희 과에서 "너 진짜 전전 같다"는 말은 칭찬으로 쓰이는 것 같지는 않아요. 보통 과제랑 시험에 찌든 공대생 같다는 의미에 더 가깝거든요.
특히 시험기간이 되면 머릿속이 전공 관련 단어로 가득 차서 별의별 헛소리를 다 하게 돼요. 한 번은 교재에 나온 스마일 모양 함수를 보고 귀엽다고 웃고, 전자기장을 보면서 "자기? 스윗하다~" 이러면서 놀았던 적도 있어요.
그럴 때면 친구들이랑 꼭 같은 말을 해요.
"우리 진짜 전전 같다... 탈전전 해야겠다."
"이제는 노래방도 순수하게 즐길 수 없어요."

홍윤지, 성신여자대학교 성악과 24학번
성악을 전공한 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묻자 윤지씨는 이렇게 답했다. 노래를 듣는 순간 발성과 호흡이 들리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에는 어느새 스스로를 레슨하고 있게 된다고. 그녀가 앓고 있는 전공병은 '영어 퇴화 이태리어 우세 증후군'과 '무의식적 복식 호흡 증후군'이다.
성악을 전공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방식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냥 노래를 듣고 좋다, 안 좋다 정도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자연스럽게 발성이나 호흡, 공명 위치를 분석하게 되더라고요. 심지어 친구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도 '저 부분은 호흡을 이렇게 쓰면 더 편할 텐데' 같은 생각이 먼저 들 때가 있어요.
성악을 전공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노래방을 순수하게 즐기지 못하게 된 거예요.
예전에는 그냥 신나게 부르기만 했다면, 지금은 음정이나 발성, 호흡을 계속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를 레슨하듯 노래하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기도 해요. 심지어 녹음까지 해서 소리나 음정을 체크하고 있을 때면 "아... 나 진짜 성악과구나" 싶습니다(웃음).
친구들이 저한테 가장 자주 하는 말이에요. (웃음) 노래방에 가면 저도 모르게 성악곡을 고르거나, 평범한 가요를 부를 때도 성악 발성이 튀어나오거든요. 호흡을 제대로 쓰고 소리를 멀리 보내는 버릇이 있어서 "일반 노래도 무슨 오페라 공연처럼 부르냐"며 장난 섞인 핀잔을 듣곤 해요.
이런 습관이 말할 때도 그대로 묻어나서 평소에 발성 좋다는 소리도 자주 들어요. 특히 카페나 술자리처럼 시끄러운 곳에서 다 같이 떠들 때도, 제 목소리는 묻히지 않고 귀에 쏙쏙 잘 들린다고 친구들이 신기해하더라고요.
"미술관에 갔는데 작품은 안 보고 건물만 보고 왔어요."

조윤재 | 홍익대학교 자율전공 (건축학전공 진입 예정) 22학번
건축을 배우고 나서부터는 건물을 보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윤재 씨. 계단을 보면 폭과 높이를 가늠하고, 공간을 보면 층고와 스케일을 계산한다. 심지어 미술관에 가서도 작품보다 건물 구조와 빛의 흐름을 먼저 보게 된다고. 그는 자신의 전공병을 '스케일 측정 강박증'이자 '건축 공간 분석 증후군'이라고 정의했다.
전공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나 버릇이 있나요?
건축을 배우고 나서부터는 건물을 보면 자연스럽게 분석하게 되는 것 같아요. 특히 치수에 예민해졌어요. 계단을 보면 폭과 높이를 가늠해 보고, 건물의 층고나 공간의 스케일도 무의식적으로 계산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건축학과 하면 야작을 빼놓을 수 없죠. 설계 과제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서 "이게 더 예쁜가?", "이게 컨셉에 더 맞나?" 고민하다 보면 끝이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 만성 피로와 수면 부족은 거의 기본 옵션이 된 것 같아요.
이쯤 되면 설계실이 아니라 생활실.예전에 동아리 사람들과 미술관에 간 적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보고 감상하는데, 저는 건물 구조나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같은 것만 보고 있더라고요. 관람이 끝난 뒤 작품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는 정작 할 말이 없었어요. 그때 "아, 내가 건물만 분석하고 왔구나" 싶었습니다.
또 건축에서는 기본 단위로 mm를 많이 사용하다 보니 가끔 다른 전공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단위가 꼬이기도 해요. 저는 아무렇지 않게 300mm라고 말하는데 상대는 cm로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럴 때마다 건축학과식 사고가 몸에 밴 걸 실감합니다.
마감 기간이 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인 것 같아요. 며칠씩 밤샘 작업을 하다 보면 동방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일도 많고, 솔직히 노숙자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거든요. 친구들도 "좀 씻고 학교 와라"라고 놀릴 정도예요.
그런데 또 마감날만큼은 집에 가서 씻고 옷도 최대한 멋있게 입고 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데이트 가냐?"고 놀리더라고요. 건축학과의 극과 극 갭 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웃음).
"내가 소비자 상담과 피해구제 강의 들었으니까 도와줄게!"

추예슬, 성신여자대학교 소비자산업학과
친구들이 환불이나 중고거래, 구독 서비스 해지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으면 예슬 씨는 자연스럽게 해결 방법부터 찾아본다. 소비자산업학과에 진학한 뒤부터는 광고를 봐도, 물건을 사도, 친구들의 소비 고민을 들어도 소비자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고. 그녀는 자신의 전공병을 '소비자상담센터 직원 빙의 증후군'이라고 정의했다.
전공을 공부하면서 일상에 생긴 사소한 버릇이 있나요?
소비자산업학과에 온 뒤로는 일상 속에서 광고를 볼 때 마케팅 전략이나 브랜딩 방식부터 생각하게 돼요. 광고를 보며 단순히 '우와' 하고 넘기는 게 아니라, '이 광고는 어떤 소비자층을 타깃으로 삼았을까?', '구매 욕구를 자극하려고 무슨 전략을 썼을까?'를 자연스럽게 따져보게 되더라고요.
이런 성격 탓에 물건을 살 때도 후기를 진짜 꼼꼼하게 읽는 편이에요. 덕분에 인터넷 쇼핑 실패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답니다. 저를 잘 아는 친언니는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저한테 링크를 보내면서 "리뷰 좀 검증해 봐라" 하고 시킬 정도예요.
"나 진짜 전공병 제대로 왔구나" 싶었던 웃픈 순간이 궁금해요.
전공 강의에서 소비자의 권리와 책임을 배우면서, 나름 '윤리적 소비'를 지향하려고 노력하게 되었거든요. 사회적·환경적 이슈가 있는 기업의 제품은 가급적 피하고,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를 고려해서 구매하려는 저만의 기준이 생겼어요.
하지만 최애 캐릭터인 '치이카와 굿즈' 앞에서는 이런 엄격한 기준이고 뭐고 다 무너져요. 일단 눈에 보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고 본답니다. (웃음)
인터넷 쇼핑할 때 반품이나 교환 주의사항을 유독 꼼꼼하게 읽게 되는 것도 전공병 같아요. 소비자법을 배우다 보니 교환이나 환불 규정을 잘 몰라서 손해 보는 소비자들이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법에 어긋난 쇼핑몰을 발견해도 진짜 신고까지 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런 곳에선 소비하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읽는 버릇이 생겼어요.
주변 친구들에게 "너 진짜 우리 과 같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친구들이랑 대화할 때 "너는 전공에서 배운 걸 실생활에서 참 잘 써먹는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친구들이 "어떤 물건을 샀는데 완전 꽝이었다", "중고 거래 사기당한 것 같다"라며 억울해하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소비자상담센터 직원처럼 빙의하거든요.
그럴 때마다 단톡방에 "내가 소비자 상담과 피해 구제 강의 들었으니까 다 해결해 줄게 걱정 마!", "소비자 심리를 이용해야 하니까 글 이렇게 다시 수정해서 올려봐"라며 출동하곤 해요. 타과 친구들이 우리 학과 어떠냐고 물어볼 때도 그래요. 저도 모르게 애교심이 폭발해서 "우리 학과만큼 좋은 곳 없다"며 영업을 뛰는데, 그럴 때면 다들 "너 진짜 전공 사랑하는구나"라며 웃어주곤 한답니다.
"방금 네가 말한 거, 칸트가 비슷한 말을 했어."

이강민 |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21학번
철학과 학생의 전공병은 의외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대화 속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도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무언가를 설명하기 전에는 개념부터 정의하려는 습관이 생겼다는 강민 씨. 그는 자신의 전공병을 '아무때나 반박중독증'이라고 정의했다.
원래부터 철학과 책 읽는 걸 좋아해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는데요. 굳이 하나를 꼽자면, 대화를 할 때 용어를 먼저 정의하고 시작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친구가 어떤 음악 장르를 좋아한다고 하면, 저는 자연스럽게 "그 장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지?", "좋아한다는 건 정확히 어떤 의미지?" 같은 질문을 하게 되거든요. 덕분에 친구들이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말싸움을 할 때는 서로 어디서부터 생각이 달라졌는지 빨리 찾을 수 있어서 좋기도 합니다.
친구들과 '가해자가 된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어요. 친구들은 영화나 만화 속 캐릭터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도 가고 불쌍하기도 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저는 자연스럽게 니체의 말을 인용하게 됐어요."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
저는 나름 맥락에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들은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더니 "너만 아는 얘기 하지 마"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저는 조용히 물만 마셨습니다(웃음).

철학과는 다른 예술 계열 전공처럼 겉으로 티가 나는 행동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대신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철학자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방금 네가 말한 거 칸트도 비슷하게 말했어.", "그 주장 예전에 데리다가 반박한 적 있어." 같은 식이요.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너만 아는 얘기 하지 마라.", "그게 뭔데 철학과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또 철학자 얘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아마 이게 철학과 전공병인 것 같습니다.
"저 사람 잘생겼는데 혈관도 진짜 잘 보인다."

김지인 | 서울여자간호대학교 간호학과 23학번
누군가는 사람을 얼굴부터 보지만, 간호학과 학생은 혈관부터 본다. 친구가 두근거린다고 하면 설렘보다 맥박이 걱정되고, 기분이 우울한 날에는 스스로에게 간호진단을 내린다. 지인 씨는 자신의 전공병을 '감정 사례연구 병'이자 '혈관 자동 탐지 증후군'이라고 설명했다.
간호학과에 오고 나서 가장 크게 생긴 건 안전집착증인 것 같아요. 아프리카 해외봉사를 갔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목베개나 간식을 챙길 때 저는 모기장을 구하고 있었거든요. 말라리아 예방약까지 챙겨 먹었는데, 막상 가보니 예방약 먹는 사람이 저밖에 없더라고요. 숙소에 도착해서도 감염 위험을 줄이겠다며 방역에 진심이었고요.
또 실습을 하면서는 케이스스터디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습관도 생겼어요. 예전에는 그냥 "왜 이렇게 우울하지?" 하고 넘겼다면, 지금은 "현재 스트레스 요인이 뭐지?"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심장이 두근거려도 설렘보다 심계항진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확실히 전공병이 맞는 것 같아요. (웃음)
사람을 볼 때 혈관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을 때예요. 추석에 간호사로 일하는 사촌오빠가 갑자기 팔을 내밀면서 "연습할래?"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용돈이라도 주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실습 연습을 해보라는 뜻이더라고요.
다른 가족들은 무섭다고 도망갔지만 저희 둘은 진지하게 혈관 상태를 평가하고 있었어요. 그날 처음으로 간호학과 사람들의 친목 방식은 조금 다르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웃음)
그 이후로는 혈관이 잘 보이는 사람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와, 진짜 잘 잡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실제로 친구가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 잘생겼다"고 했는데, 저는 "근데 혈관 진짜 잘 보인다"라고 답했다가 한참 혼난 적도 있습니다.

친구들이 저한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너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말이에요. 간호학을 공부하고 실습을 하면서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고, 삶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거나 "불쌍하다"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그 사람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친구들이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때면 저는 종종 "그 사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와, 간호학과 아니랄까봐"라며 웃곤 해요. 생각해보면 간호학과에 와서 얻은 가장 큰 변화는 질병을 보는 법보다 사람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습니다.
남들은 그냥 지나칠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전공 안경을 쓰고 새로운 시선을 발굴해 내는 것. 어쩌면 전공병은 빽빽한 과제와 시험의 터널을 묵묵히 버텨낸 대학생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상 속에서 눈치 없이 튀어나오는 전공병 때문에 피식 웃음이 터졌더라도 너무 당황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내 전공의 세계에 깊이 몰입한 채, 대학 생활을 성실하게 채워왔다는 분명한 증거니까.
만성 질환이면 좀 어떠랴. 어차피 졸업하기 전엔 완치되지 않을 전공병이라면, 남은 학기 동안 기분 좋게 앓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