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마음 한구석에 선명히 남아있는 짝사랑의 기억이 있다. 온종일 핸드폰을 붙잡고 보낼까 말까 망설이던 메시지 한 줄, 멀리서 실루엣만 보여도 요동치던 심장, 상대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며 밤을 지새우던 나날들.
하지만 짝사랑은 풋풋한 만큼, 때론 지독하게 찌질하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도 불쑥 떠오르는 그 시절 나의 흑역사들은 뒤늦은 이불킥을 부르고 가슴 한편을 아려오게 만든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서툴렀던 그 시절의 우리가 그 누구보다 뜨겁고 열렬하게 사랑을 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의 이상형을 듣고 마음을 접어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
최00 성균관대학교 25학번 / 짝사랑 3개월
출처: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방학 때 대외활동으로 초등학생들을 가르쳐주는 일주일짜리 캠프에 참여했어요. 캠프 창단식 날, 누가 제 뒤를 툭툭 치며 밝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는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때 건너 알고 지내던 후배더라고요. 대화를 하다 보니 말도 잘 통하고, 밝고 명랑한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일주일간 숙박을 해야 하는 캠프였어서 우리는 틈틈이 대화하며 친해졌어요. 그렇게 캠프 마지막 날이 되었고, 저녁을 먹고 밖을 산책하는데 날씨가 너무 좋은 거예요. 카더가든의 '가까운 듯 먼 그대여'를 듣다 느닷없는 용기가 솟아올라, "밖에 날씨가 좋던데 잠깐 걷자"고 카톡을 보냈습니다. 잠시 뒤 돌아온 답은 바빠서 안 된다는 이야기였어요. 거절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죠.
다음 날, 캠프가 끝나고 회식이 있었어요. 상처가 아직 남은 저는 그녀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국그릇에 코 박고 밥만 먹었어요. 그러고 있는데, 그 후배가 와서 어제는 정말 바빴다며 개강하면 밥 한번 먹자고 하더라고요. 내가 싫은 게 아니구나 싶었죠. 틈틈이 인스타그램 스토리가 올라올 때마다 좋아요를 누르고 답장도 하며 연락을 주고받다가 두 달 후, 개강과 함께 약속을 잡았어요.
출처: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약속 당일. 떨리는 마음으로 살면서 처음으로 음식점 예약도 하고, 옷도 주변 친구들에게 검사받은 후 그녀를 만나러 갔어요. 마침 식당 저희 옆자리에서도 소개팅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커플데이트라도 하는 것마냥 사랑이 싹트는 분위기가 연출될 것 같아 좋았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이상형을 물어봤어요. 그 전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고 생각해서 내심 저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어요.
"저는 다른 거 다 안 보고 딱 하나 봐요. 키가 180은 넘었으면 좋겠어요."
제 키는 172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차라리 "지금부터 키 크는 운동을 해야겠다."며 유쾌하게 받아쳤으면 좋았을 텐데, 멘탈이 갑자기 흔들렸나 봐요. 얼마나 속상했는지 2차로 간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오다가 그만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그 친구 앞에서 넘어졌어요. 그 친구가 저를 부축해 주고 치우는 걸 도와주는데, 그때부터는 정말 집에 가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그날의 데이트를 끝으로 제 짝사랑은 끝이 났습니다. 남자의 키는 군대 가서도 큰다던데, 저도 더 클 수 있겠죠?
첫눈이 오던 날, 혼자만 집에 가고 싶었던 사람의 이야기
김00 경희대학교 22학번 / 짝사랑 1년
출처: 영화 <건축학개론>
동아리 면접을 보러 간 날이었어요. 그 친구가 앉아 있는 자리만 이상하게 후광이 보이더라고요. 좀 더 자세히 봤다간 준비한 면접을 망칠까 봐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동아리에 붙어야겠다는 결심만큼은 더 확고해졌죠.
합격한 뒤로 그 동아리 활동에 정말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제가 낯을 많이 가리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안 하는 편이라 다른 동아리에선 '프로 불참러'로 유명했거든요. 하지만 그 동아리만큼은 '프로 참석러'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친구가 가는 자리마다 다 참석했죠.
친해지긴 했지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없었어요. 제 나름대로는 표현했지만,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 그 친구는 전혀 몰랐을 거예요. 주로 표현했던 때는 거의 매주 있던 동아리 회식 때였어요. 다들 술을 잘 마시는데, 저랑 그 친구만 술을 잘 못 마시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회식 때 그 친구 앞자리에 앉아서, 잔이 비면 술 대신 물 슬쩍 따라주고, 짠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가끔 얼굴이 빨갛진 않은지 서로 물어볼 때가 있었는데 그때 많이 설렜어요.
출처: 영화 <건축학개론>
동아리 부원들이 다 같이 친하게 지냈다 보니 더 조심스러웠어요. 괜히 마음을 조금이라도 드러냈다가 동아리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겁이 났거든요. 회식 이후 지하철역까지 같이 걸어갈 때가 종종 있었어요. 집 방향이 반대라서 역에 도착하면 헤어져야 하는데, '지금 말이라도 더 걸까?', '같은 방향인 척 조금 더 가볼까?', '그렇게 하면 부담스러워하려나?' 같은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고민할 시간에 더 용기를 낼 걸 그랬네요.
그렇게 어영부영 1학년이 지나고 종강 파티 날, 그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필 그날은 그해 첫눈이 내리고 있었고요. 다들 좋아서 웃는데, 저만 영화 <악마를 보았다> 마지막 씬 이병헌 표정이었어요. 영화도 아니고, 이런 날 첫눈이라니.
그 뒤로 며칠 몸살을 앓았습니다. 마음이 아프면 진짜 몸도 아프더라고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후련했어요. 혼자 맴돌던 마음을 이제 그만 접을 완벽한 계기가 생겼으니까요.
잘 지내지? 그때 덕분에 학교 가는 매일이 꽤 설레고 재밌었어.
상대방의 이름 때문에 짝사랑을 포기했던 사람의 이야기
박00 한양대 23학번 / 짝사랑 2개월
출처: 영화, <500일의 썸머>
여름방학 때 자격증 공부를 위해 집 근처 독서실을 끊었어요. 그리고 매일 아침 10시에 가서 오후 3~4시까지 공부하곤 했습니다. 저도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저보다 늘 더 부지런하게 와서 더 열심히 공부하던 독서실 옆자리 분이 있었어요.
그렇게 독서실 자리가 붙어 있다 보니 내적 친밀감이 생기더라고요. 사소한 일들도 있었는데, 하루는 그분이 먼저 독서실 프린터기 앞에 서 있던 저를 보고 혹시 프린트가 되는지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된다고 설명드리면서 사용 방법도 알려드렸습니다. 말하는 과정에서 그분이 가볍게 웃으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 예뻤어요. 집에 와서 한동안 그분이 웃으시는 모습이 아른거렸어요. 그때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이후로 원래는 독서실에 편한 차림으로 갔는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한참을 준비해서 차려입고 가고 있더라고요. 부모님께서도 독서실에 가는 게 맞는지, 놀러 가는 건 아닌지 물어보신 적도 있어요.
출처: 영화, <500일의 썸머>
방학 내내 약 2개월간 주말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둘이 친해지거나 대화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어요. 보통 자리를 뜨는 시간이 밥 먹거나 카페에 갈 때 정도였는데, 괜히 따라 나가서 불편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고, 독서실 근처 밥 먹을 곳이 한정적이라 같은 곳에서 먹었다가 더 어색해질 것 같아서 다른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근처 카페에서 줄을 기다리고 계시던 그분을 보고 저도 가서 커피를 사는 척 줄을 서며 말을 걸었습니다.
"00 독서실에서 공부하시는 분 맞으시죠? 제 옆자리에서 너무 열심히 공부하시길래 뭘 준비하시는지 궁금했어요."
갑작스러운 인사말이었지만 다행히 저를 알아보시고, 웃으시면서 친절하게 답변해 주셨어요. 그래서 더 호감이 생겼고, 내친김에 동네 친구라도 하고 싶다며 능청스럽게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맙소사. 맞팔로우를 한 뒤 나중에 들어가 보니 제 누나와 이름이 같으시더라고요.
통성명을 따로 하지 않아서 이름은 인스타그램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됐는데, 성은 달랐지만 이름이 같다는 사실 자체가 제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누나와 친하게 지내는 편이긴 하지만, 누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분을 좋아한다니 기분이 오묘해지더군요. 만약 잘돼서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날이 온다면 더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누나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전 독서실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