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제1회 <글월문예> 대상작

작품명: 나는 네가 날 보면서 그렇게 진저리치는 게 좋아

제1회 <글월문예> 대상작

작품명: 나는 네가 날 보면서 진저리 치는 게 좋아

정혜인,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나를 사랑하는 정일에게
정일아. 나는 본인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좋다. 그냥 적당히 좋아하면 안 되고. 사랑해야 돼. 어쩌면 내가 사랑하고 애정하는 대상이 많지 않아서 그럴지도 몰라. 지효가 피겨 선수들에 대해 설명할 때나, 도진이가 자취방에서 모은 그릇들을 자랑할 때,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영화들을 들뜬 목소리로 풀어낼 때, 그럴 때마다 난 기분이 무척 좋았어. 그걸 티내지 않았을 뿐이지.

너희가 눈을 빛내며 각자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실 난 너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은데, 나는 또 그 웃음을 숨기려고 그걸 비웃음으로 조금 바꿔 표현하지. 에이 그거 그 정도 아니야- 하면서 말이야. 그러면 넌 발끈하고 난 또 까르르 웃어버려.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 내 꿈이 현모양처라는 얘기를 들었던 날 밤, 너도 날 마음껏 비웃었잖아. 그때 넌 내가 술에 취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나를 정말 처치 곤란한 피곤한 존재처럼 바라보았지. 사실 난 네가 나를 보며 그렇게 진저리치는 게 좋아. 그런 김에 한술 더 떠서, 네가 열받아할 발언 하나만 더 할게.

난 내가 육아에 재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내 아이를 아주 잘 키워낼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이 무려 고등학생 때부터 있었어. 어린아이는커녕 사촌동생하고 놀아준 적도 없잖아. 너라면 이렇게 말하겠지? 그치만 난 내가 낳은 자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 애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막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아.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나는. 그리고 그 사랑으로 아이를 정말정말 잘 키워낼 거야. 정말로.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미국의 한 작가의 말이라는데, 공감해. 사랑으로 안 되는 건 없어. 내 아이가 아무리 비뚤어지려고 해도, 내가 사랑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이 오만한 자신감. 그건 내가 아직 사랑을 못 해봐서, 사랑을 지나치게 신격화하는 탓일까? 사실 난 비뚤어진 인간들을 보면 그들이 불쌍하고, 그들의 부모가 한심하기까지 해. 내가 저들의 부모였다면 난 저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주었을 텐데. 그 사랑으로 저들을 바로잡아주었을 텐데. 와, 방금 발언은 진짜 오만했다. 그런데도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몇 번 있어.

정일아. 요새 나는 이따위 생각들로 시간을 보내. 그러다 어제는 네 생각이 났어. 만약 네가 갓난아이가 되어서 내게 맡겨진다고 했을 때, 나는 널 지금보다 나은 사람으로 키워낼 수 있을까? 하고. 그런데 그건 전혀 자신이 없더라. 생각해보니 넌 정말 여러 방면에서 괜찮은 놈이더라고. 널 키워준 부모님과 누님께 감사해라. 넌 아주 잘 자란 아들이야. 받은 사랑만큼 사랑을 건넬 수 있는 인간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이건 네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야. 내가 아직 누군가를 사랑할 정도로 성숙한 인간이 아닌 거야.

정일아.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어. 우리가 연락을 끊은 지는 보름이 지났고. 네가 나를 좋아한 지는 5년이 넘었는데 말이야.
처음 네 고백을 받고 한동안은 이런 생각을 했어. 그냥 내가 네 애인이 된다면, 우리 앞에 놓인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네 애인만 되어준다면, 그것만 양보한다면, 넌 다른 사소한 문제들을 모두 나에게 맞춰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런 마음가짐이라니. 나도 나지? 너와 여러 갈등에 대해 타협할 마음이 없는 내게, 너와 연애를 하라니. 너와의 연애를 양보라고 생각하는 내게, 너를 사랑하라니.

나도 사랑하고 싶어. 너를 사랑하고 싶고, 사실 네가 아닌 누군가라도 좋으니 사랑을 하고 싶어. 그런데 나는 대체 그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날 밤에도 말했듯, 우린 사랑을 논하기에는 아직 어리고, 진심은 언제나 상황에 의해 변하는 것이라고. 나는 모든 진심을 그렇게 생각해왔거든. 알다시피 사람의 진심을 가벼이 여기는 건 내 단점 중 하나잖아? 특히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그래서 나는 솔직히 네가 주는 사랑도 크게 고맙지 않아. 그냥 궁금해. 너는 내게서 무엇을 보았니? 내 무엇을 보고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일아. 이 편지의 시작을 기억해? 나는 본인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좋다고 했잖아. 그렇지만 이제 넌 탈락이야. 네가 사랑하는 건 나니까.
이 편지를 끝으로 우리 인연은 완전히 단절될까? 모르겠어. 적어도 한동안은 서로 연락하지 않겠지. 나중에는 누구 하나가 결혼을 앞두고 있고,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너무 멀어져서 청첩장을 줄지 말지 고민이 되는, 그런 사이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 상상만 해도 슬프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내 이상형이 어른스러운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너는 계속 어른스러운 척을 했지. 내가 보기에는 이런 것들을 견뎌내는 게 바로 어른인 거야.

정일아. 미래의 우리 사이가 변한다고 해도, 우리가 정말 훌륭한 우정을 공유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야. 너만한 친구를 다시 사귈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어. 그치만 한편으로는… 어느 순간부터 나는 널 볼 때마다 안쓰러웠고, 너는 내 마음에 들고 싶어서 항상 노심초사했지. 어떻게든 친구인 척하던 우리 사이에는 사랑인 척하는 동정이 있었고, 설렘인 척하던 불안이 있었다는 걸 이제 인정하자. 너는 나 없이 살 수 없다고 했지만, 난 여전히 네가 할 수 있다는 걸 믿어. 그러니까 잘 살아.

p.s. 이 편지를 쓰면서 깨달았는데, 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에게 “도와줄게”라고 말하는 걸 잘 못해. 그러니까 정말 힘든 일이 생겨서 도움이 필요하면 네가 먼저 날 찾아. 그럼 내가 도와줄게. 우리 사이에 생긴 거리감과 상관없이 네가 너무 힘들면 너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다. 너를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해.

26년 봄의 어느 날.
너를 사랑하지 못한 친구가 너를 떠나보내며.




당선 소감



평소 손편지를 좋아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오래된 손편지를 좋아했어요. 10년 전 친구가 써준 편지, 고등학교 졸업 당시 동창생들끼리 돌려쓴 롤링페이퍼, 심지어는 전애인의 편지까지, 오래된 편지는 늘 제게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물론 편지는 이러나 저러나 아주 불편한 수단입니다. 우선 손이 많이 아파요...^^ 글을 수정하고 싶어도 쉽지 않아 아예 편지지를 바꾸기가 빈번합니다. 더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메모장에 미리 적어보기도 하고, 나의 최선의 글씨체를 찾아내고자 심혈을 기울이게 됩니다. 편지를 부친 뒤에도 상대가 무사히 내 편지를 받기를 소원하고, 상대의 답장을 기다리게 됩니다. 

문자 메시지나 sns 같은 오늘날의 연락수단과 비교하면 아주 번거롭지만, 그만큼 정성과 진심이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손편지를 써주세요. 감사 혹은 사과를 전하고 싶은 이에게도 손편지를 써주세요. 좋은 선물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포함한 많은 젊은이들이 손편지 속 정성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대학내일 주최측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따뜻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공모전이 오래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편집부 선평


20대는 고백과 거절이 수없이 오가는 시절입니다. 고백하는 사람은 마치 노래 제목처럼 사랑하는 이유 백 가지를 줄지어 씁니다. 쓰다 보면 백 가지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이렇게 오래 고민해 적어 내려간 편지를 받은 사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사귀거나', 혹은 '거절하거나'.

이 사이엔 늘 설득과 고민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한 결과가 '좋아', 혹은 '미안해'이기 때문입니다. 고백한 사람 입장에서는 마치 라디오 사연을 쓰고 경품 당첨을 기다리는 기분이 들 겁니다.

그러나 둘의 관계를 결정하는 건 고백을 받은 사람의 몫입니다. 거절하는 마음은 고백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거절은 곧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백보다 더 많은 고민과 이유가 필요합니다. 단지 우리에게 거절 '편지'가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다.

<멀리 떠난 친구에게>라는 주제로, 누군가를 떠나보낸 수많은 사연이 대학내일 우편함을 두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작성자의 의지로 상대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이 이야기가 편집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평소 이해해 보려 생각지 못했던 마음에 주목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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