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다중인격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가

"23 아이덴티티" 이게 실화라고?
   
23 아이덴티티
감독 나이트 M. 샤말란 출연 제임스 맥어보이, 안야 테일러 조이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의 몸에는 23개의 인격이 함께 산다. 언제 누가 등장할지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도 늘 혼란스럽고 사회에서는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건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플레처 박사(베티 버클리)뿐. 어느 날 케빈은 지금껏 등장한 적 없던 24번째 인격을 불러내기 위해 케이시(안야 테일러 조이)를 비롯한 3명의 소녀를 납치한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나머지 인격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진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력이다. 9살짜리 소년 헤드윅에서 결벽증 환자 데니스까지 인격마다 미세하게 달라지는 표정 연기는 묘기에 가깝다. 덕분에 영화는 긴장감이 배가됐다. 그러나 명연기도 실제 다중인격장애에 시달렸던 ‘빌리’의 혼란과 상처를 충분히 보여주진 못한 듯하다. 빌리는 주인공 케빈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빌리 밀리건’이다.

 
이게 실화라고?

   
TV를 보던 빌리 밀리건은 집으로 출동한 특수기동대에 붙잡혔다. 납치·강도·성폭행 혐의였다. 피해자의 차에 남은 지문과 빌리의 지문이 일치했고 피해자들의 증언도 빌리를 가리켰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상한 건 빌리의 태도였다. 빌리의 집에서 빌리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자기는 빌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내가 그랬어요?”라고 되물으며 “누군가 다치게 했다면 미안해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사람들은 빌리가 처벌을 면하기 위해 정신이상을 꾸며낸다고 의심했지만 그를 여러 번 만난 변호사와 의사들은 그가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다고 확신했다. 연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인격이 바뀔 때마다 말투, 성격, 목소리, 지능, 심지어 신체 능력까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의 반발이 심했지만, 1977년 빌리는 결국 법원에서 다중인격장애를 인정받았다. 세계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밀히 말해 <23 아이덴티티>를 실화라고 할 수는 없다. 빌리가 영화 속 케빈처럼 사람의 배를 물어뜯거나 총알을 맞아도 죽지 않는 몬스터로 변했던 건 아니니까. 뿐만 아니라 나이트 M. 샤말란 감독은 독특한 납치범 캐릭터로서의 케빈을 부각시키는 데 집중한다. 스릴러의 재미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피해를 줄 바에야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게 낫다며 수 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빌리를 생각하면 감독에게 야속한 마음이 든다.



그는 왜 24조각으로 나뉘어야했나   

“외롭거나 지루하거나 슬픈 기분을 느낄라치면,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뜨면 다른 장소에 있었고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빌리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를 혼내지 않아서 기뻤다.” 다중인격 장애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연구자들은 환자의 80% 이상이 어린 시절 학대를 당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빌리도 그랬다. 얻어맞거나 혼날 때 주어지는 고통은 어린 빌리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때마다 가상의 인격이 빌리의 자리를 대신했다. 엄마와 아빠가 시끄럽게 싸울 땐 귀가 들리지 않는 ‘숀’의 인격이 나타나는 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계부 챌머는 ‘마굿간에 묻어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빌리를 성적으로 학대했고, 그날 빌리의 인격은 스물네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갓난아이들은 무방비 상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어른의 도움을 받아 취약한 부분을 보완하고 주위 환경에 대처하는 법을 하나씩 깨닫는다. 인격은 이 과정을 통해 발달한다.  

만약 이 시기에 도움은커녕 학대를 당한다면? 아이들은 도망가는 법을 머릿속에서 먼저 배운다. 끔찍한 기억은 작은 꾸러미에 담겨 따로 뇌에 저장된다. 이 기억은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아이가 고통받을 때마다 다시 살아나고, 꾸러미는 점점 커져 어엿한 하나의 인격으로 자란다. 빌리 안에는 그런 인격이 24개나, 아니 24명이나 존재하는 것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감독은 관객들이 구분하기 쉽도록 인격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다는 설정을 추가했다. 헤드윅은 노란 트레이닝복, 데니스는 정갈한 셔츠, 패트리샤는 치마와 구두. 하지만 현실에서 빌리는 그렇지 않았고, 언제 어떻게 인격이 드나드는지 몰라 사람들은 훨씬 더 혼란스러웠다. 빌리는 여러 인격 중 하나가 들어오는 순간을 ‘스포트라이트 같은 것’이라 고 표현했다. 조명을 받는 한 명 외에는 빙 둘러서서 지켜보거나 자기 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빌리 안의 세상도 여느 조직과 비슷했다. 합리적인 영국인 아서와 힘이 센 레이건이 리더 역할을 했고 말 잘 하는 앨런은 협상이 필요할 때, 손기술이 좋은 타미는 탈출해야 할 때 자리를 차지했다. 아서는 ‘거짓말하지 말 것’, ‘자기 향상을 위해 노력할 것’ 등 나름의 룰도 세웠다. 룰을 지키지 않는 ‘불량자들’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못하게 억압했다.

그러나 인격의 드나듦을 완벽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폭력적인 성향 때문에 ‘불량자들’로 분류됐던 필립이 자꾸만 나타나 마약을 팔고, 결국은 범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빌리는 본인의 증상을 알아본 데이비드 콜 박사를 만나 꾸준히 인격 융합 치료를 받았고, 1991년 드디어 완치 판정을 받는다. 만약 다중인격장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빌리의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논픽션 『빌리 밀리건』을 추천한다. 놀랍고 생생한 이야기에 금방 빠져들 것이다.


참고한 책들『빌리 밀리건』, 대니얼 키스, 황금부엉이, 2007.『다중인격의 심리학』, 리타 카터, 교양인, 2008.『다락방 속의 자아들』, 할 스톤·시드라 스톤, 정신세계사, 2015.


 
#23아이덴티티#영화#다중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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