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비독립일기] - 3화- 방 밖에 누군가 있다
네 명이 사는 32평의 아파트에는 사각지대가 없다.

지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저녁, 전화벨이 울렸다. 썸 타는 애였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빅 이슈는 뭐였는지, 요즘 어떤 생각에 꽂혀 있는지, 서로의 반려동물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통화한 지 채 10분도 안 됐을 무렵, 방문이 벌컥 열리고 버럭 하는 소리가 날아들었다.
“누구랑 이렇게 통화를 해!”
내가 있는 곳은 사감이 있는 기숙사가 아니었다. 수련회나 템플스테이를 온 것도 아니었다. 우리 집, 나의 방이었다. 소리친 사람은 엄마였다. 통화는 계속 이어졌지만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해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 통화하는데 왜 그러냐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누구랑 통화했는데?” 내가 누구와 통화하는지 궁금했던 엄마가 장난을 친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누구랑 통화하든 뭘 그리 궁금해하느냐고 묻자 “딸내미한테 그런 것도 못 묻냐?”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논쟁은 하면 할수록 나만 속 좁은 사람이 된다. 나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하룻밤이 지나도록 나가지 않았다.

네 명이 살고 있는 32평의 아파트에는 사각지대가 없다. 어릴 때 부터 가족들의 통화를 쉽게 엿들을 수 있었고,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기상시간은 비슷하지만 취침 시간은 각자 다른데, 몇 시에 잤는지조차 숨기기 어렵다.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나 거실, 화장실 들락이는 소리까지 다 들리기 때문이다. 설거지 거리, 쓰레기통에 버려진 포장지, 줄어든 식재료 등으로 식사 여부와 메뉴까지 알 수 있으니 말 다 했지.
외출 시 목적지는 기본으로 브리핑해야 하고, 귀가 후에 어딜 다녀왔는지,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는 말 안 해도 옷에 베인 냄새로 알 수 있다. 명탐정 코난이 따로 없다, 아주.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택배는 질문 세례를 받을 것이며(설명은 생략한다), 천이 모자란 속옷을 산다면 세탁기에 돌려진 후 거실에 전시될 것이다…. 떳떳해지고 싶지만 밀려드는 부끄러움은 결국 나의 몫이다.

가족들은, 특히 엄마는 서로가 서로의 일상에 관심을 가지고 잘 알고 있는 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 집에 살면서 비밀이 생긴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완전범죄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
그럴 깜냥이 못 되는 나는 아예 비밀이란 걸 안 만드는 쪽을 택했다. 질문이 들어오기 전에 모든 걸 실토하고, 집에서는 가급적 통화를 하지 않는다. 수다의 끝은 “다음에 또 통화하자~”가 대부분인데, 먼저 전화를 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나는 어느새 ‘통화를 싫어하는 애’가 되어 있었다. 메시지만 고집하는 바람에 속내를 잘 보여주지 않는 비밀스러운 애로 오해 받은 적도 종종 있다.

조금 슬퍼 보이지만, 이는 내가 이 집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하다. 비밀을 만들지 않고 결백함으로써 나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다. 형제를 보면 이 방법이 꽤 유용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비밀이 많은 그의 행동에는 온갖 물음표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뭘 먹고 다니는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밤중에 밖에 왜 나가는지…. 먼저 실토하는 대신 사랑을 가장한 간섭과 의심의 눈초리를 덜 받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썸 타는 애와의 통화 내용까지 결백하고 싶진 않다. 이래서 연애가 잘 안 되는 건가. 그래, 그런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치졸한 마음만은 비밀로 간직해야겠다.
Illustrator 남미가
#비독립일기#독립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