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내가 한 달에 4번 재판 받는 이유
소녀상을 지키다가 한 달에 4번 재판 받고 있는 김샘
저는 매주 화요일마다 재판을 받고 있어요. 이번 학기 수업은 일부러 월요일과 수요일에 싹 몰아넣었어요. 학교부터 법원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수업 듣고 가기에는 좀 빠듯해요. 한 달에 네 번, 법원에 꼬박 출석도장을 찍은 지 2달 정도 됐네요.
지금은 4가지 재판이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대단하고 별난 사람은 아니에요.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에 다니고 있고, 새내기 땐 미팅과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고요. 그랬던 제가 어쩌다 재판을 받게 됐냐고요? 법원에 기소 된 저의 4가지 죄목을 알려드릴게요.
지금은 4가지 재판이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대단하고 별난 사람은 아니에요.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에 다니고 있고, 새내기 땐 미팅과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고요. 그랬던 제가 어쩌다 재판을 받게 됐냐고요? 법원에 기소 된 저의 4가지 죄목을 알려드릴게요.
첫째,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발표가 나왔을 때 이순신 동상 앞에서 기습 시위를 벌였어요.
둘째, 2015년 12월 28일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 발표 때, 일본대사관에 항의하러 갔고요.
셋째, 소녀상 근처 에서 농성하다가 기자회견에 참석했어요.
넷째, 2014년 농민대회에 갔어요. 이 4가지로 기소됐고, 매주 판검사님을 만나고 있어요.
둘째, 2015년 12월 28일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 발표 때, 일본대사관에 항의하러 갔고요.
셋째, 소녀상 근처 에서 농성하다가 기자회견에 참석했어요.
넷째, 2014년 농민대회에 갔어요. 이 4가지로 기소됐고, 매주 판검사님을 만나고 있어요.

아무것도 몰랐던 나를 바꾼 건
제 고향은 경기도 가평입니다. 주변에는 산 밖에 없는 시골이었죠. 촛불이니, 시위니…. 대학에 올 때까진 그런 건 잘 몰랐어요. 어느 날 후배가 제게, “언니! 수요집회 가볼래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수요집회’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집회예요. 처음엔 창피했죠. 내가 선밴데 후배보다도 모르다니 좀 그렇잖아요. 어쨌든 처음 나갔던 수요집회 날엔 비가 많이 왔어요. 그런 날에도 밖에 나온 할머니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렸어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 건, 3학년 때 참석했던 ‘평화나비 콘서트’에서였어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기부 콘서트예요. 학과 후배들과 구경 갔는데 너무 좋았어요. 수요집회에서 만났던 할머니들 생각이 다시 떠올랐죠.
그래서 숙명여대 친구들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모임을 준비했고, 이듬해에 다른 학교 친구들을 모아 ‘평화나비’ 네트워크를 만들었어요. 그때가 2014년이에요. 활동을 열심히 하려고 하니 시간이 부족해서, 개강 뒤 2~3주 나가다가 휴학했어요. ‘평화나비’ 활동을 제대로 해보려고 휴학을 많이 했고 어느새 학교에선 화석 학번이 됐네요. 저도 신기해요. 세상의 많은 문제 가운데, 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마음이 꽂혔을까요? 같은 여자여서? 저는 할머니들의 삶에 꽂혔던 것 같아요. 처음엔 할머니들이 안타깝고 슬펐어요. 그저 피해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수요집회에 나가다 보니까 다들 정말 똑똑하셨고 인권활동가에 반전운동가셨어요.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사는 일이 힘들잖아요. 그런데 할머니들은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는데도, 자기 뜻대로 행동하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다른 약자들의 인권까지도 높이려고 하시죠.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을 눈앞에서 만난 기분이었어요.
우리 대부분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자기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싸워왔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가 할머니를 도와드리는 줄 알았었죠. 그러나 할머니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 나이엔 집에 들어가서 쉬는 게 편해. 하지만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나 같은 여자나 어린아이가 없었으면 좋겠으니까 그런 거야.” 하고 당당하게 일어나서 이야기하세요.

후회하지 않아요
“드디어 해결됐네. 축하해!”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됐던 2015년 12월 28일, 제 핸드폰으로 축하 메시지들이 왔어요. 제가 ‘평화나비’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주변에서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낸 거예요. 언론에선 ‘대승적 타결’이라는 보도가 났죠. 합의 내용을 슬쩍 훑어본다면, 마치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은 것 같잖아요? 하지만 저는 절망적이었어요.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몇 푼 돈이 아닌데, 이렇게 오랫동안 싸워오셨는데…. 세 치 혀로, 몇 마디 말로 지금껏 해 온 걸 없애버릴 수 있구나, 권력이 이렇게 무섭구나 싶었거든요. 그날 이용수 할머니와 활동가들이 모여 배달 음식을 시켜서 먹는 자리에서, 제가 너무 울어버렸어요. 할머니께서 오히려 절 달래주셨죠.
“옛날엔 더 했다. 한·일 협정 하면서 끝내버렸고, 국민기금 모은다면서 끝내버렸어. 이보다 더한 일도 많았어. 지금도 잘 싸우고 있으니까 우리는 계속 싸우면 돼.” 할머니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를 불러주시며, 우는 저를 다독여 주셨어요. 더 펑펑 울 수밖에 없었죠.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다음날부터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시작됐고, 저는 농성하다가 연행됐어요. 유치장에 48시간 갇혀 있다가 풀려났죠. 저는 그 날 아침 11시에 유치장에서 나왔고, 후배들과 점심을 먹은 뒤 1시에 농성장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2시부터 한일합의 규탄 및 경찰의 폭력적 연행 규탄 기자회견이 열려서 참석했죠.
그런데 저는 ‘미신고 집회를 공모하고 주최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어요. 그래서 지금 재판에 나가고 있고요. 그날 그 자리에서 있던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유치장에 있던 제가 어떻게 기자회견을 주최하겠어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유치장에서 핸드폰을 쓰거나 인쇄물을 프린트할 순 없잖아요.
지난주 재판에서 최후변론을 했어요. “판사님, 이 활동을 한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제가 기자회견을 공모했거나 주최했다고 할 수 있는 요건과 증거가 없으니 잘 판단해달라”고요. 다음 달엔 결과가 나와요.
다행히도 민변 같은 여러 곳에서 도와주셔서 재판은 계속 진행하고 있어요. 지금은 졸업이 목표예요. 엄마가 들으면 속 터지실 얘기이긴 하지만, 앞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평화나비’ 활동이 벌써 햇수로 4년째예요. 저를 이곳에 쏟아 넣었어요. 할머니들도 못 뵈면 이상하고요.
─소녀상을 지키다가 한 달에 4번 재판 받고 있는 김샘 씨와의 인터뷰를 에디터가 옮겨 적었습니다.
Interviewee 김샘 숙명여대 한국어문학 11
Illustrator 남미가
Illustrator 남미가
#위안부#소녀상#김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