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빈틈 보이기 연습

빈틈을 보이는 일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나는 스스로를 잘 드러내는, ‘자기 공개’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꼴에 심리학도랍시고) 내가 이야기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나에게 이야기를 해준다는 ‘자기 공개의 법칙’인지 뭔지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이를 활용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상대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게끔 만들었던 경험도 있었기에 더더욱 믿어 의심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 무기력 때문에 상담을 받기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상담 14회차. 20회기 기준으로 중반부를 훌쩍 넘었을 그때, 상담사가 작정한 듯 나에게 한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기훈씨의 이야기에서 그때의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스스로 처리한 감정을 정제된 언어로,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나의 큰 장점 중 하나로 생각했던 자기 공개의 신화가 내가 세운 벽을 합리화하는 기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나자, 얼기설기 만들어둔 자아상까지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 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디까지 이야기한다는 철칙 아래 이런저런 것들을 쿨하게 오픈하는 척 행동하며 스스로를 속여온 그 역사가 어언 십오년 남짓. 얼마 전 진실을 알게 되면서, 나름 오래 알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막상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체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어떻게든 잘 포장된 이미지들, 예를 들어 일을 잘 하는 것, 학점이 좋은 것, 모든 것을 빈틈없이 해내는 것과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화려한 겉포장 아래 감춰진, 볼품없고 초라한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이런 저런 포장들을 덧대고, 일정 수준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벽을 세우고, 잘 정리된 감정들을 자기공개라는 미명 하에 보기 좋게 전시 하는 것이 대인 관계의 패턴으로 굳어져버린 까닭이었다. 이를 알아 버린 이상,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갖게 된 오랜 친구와의 술자리. 그 친구는 늘 나를 자기보다 잘난 사람 정도로 생각해왔기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상담을 받고 있다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술의 힘을 빌려 어찌어찌 이야기를 꺼내고, 네가 보기에는 내가 완벽해 보이겠지만 사실 요즘 내가 많이 힘들다, 라고 털어놓다가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고작 이 정도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힘겨워하는 나라니.  

그런 모습에 더 놀란 건 그 친구였다. 네가 그런 상황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그런 일 있으면 자기한테 조금씩이라도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나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가슴에 뭔가가 탁 걸려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풀어놓자니 이야기하지 않았던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 같아서. 그 중압감이란.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고통과 노력이 따른다는 사실을, 심리학을 배우고 또 스스로 상담을 받으며 다시금 절감한다. 이미 굳어진 대인 관계의 패턴을 깨는 것, 완벽주의로 점철된 내 삶을 스스로 깨고 빈틈을 보이는 일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그래도, 꾸준히 연습하려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Writer 임기훈 gihun.im.91@gmail.com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은 삶을 지향합니다.

 
#20's voice#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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