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여행, 내가 안 해봐서 아는데
이미 내 일상이 너무 소중하다.
“니 연애 니나 재밌지.”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론 야박하게 들린다. 그렇다고 이 말을 처음 쓴『연애하지 않을 자유』의 저자인 이진송씨가 지인들의 연애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개인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게 연애인 만큼 오히려 먼저 묻고,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한다고 한다.
문제는 “연애는 당사자인 두 사람에게만 특별한 관계임에도 타인을 관객으로 동원하고 감정 노동을 요구” 한다는 데 있다. 하루 종일 애인 얘기만 늘어놓는 친구 앞에서 맞장구만 치다가 ‘내가 왜 이걸 듣고 있지?’ 싶었던 순간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내겐 여행 얘기가 그렇다. 몇 박 며칠로 어디에 가서 뭘 하다 왔다며 한껏 들떠서 친절히 사진까지 보여주는데, 사실 나로선 큰 감흥이 없다. 연애처럼 여행 역시 ‘당사자인 너에게만 특별한 기억’이니까. 그렇다고 “니 여행 니나 재밌지”라며 신나서 떠드는 사람의 입을 막지는 않는다. 그만큼 좋았나 보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았구나, 이해하고 만다.
재밌었다는 자랑, 또 가고 싶다는 푸념을 넘어 참견으로 이어지면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 해외에도 한 번 안 가봤느냐, 거기까지 가서 그건 왜 안 보고 왔느냐, 내가 해보니까 젊을 때 여행 많이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더라 등등.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 연애 한 번 안 해봤느냐, 연애는 하면서 결혼은 왜 안 하겠다는 것이냐, 내가 해보니까 젊을 때 연애 많이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더라 등등. “연애든 여행이든 내가 알아서 할게, 쫌!”
‘여행으로 얻을 수 있는 10가지’ 같은 기사도 일종의 꼰대질이다. ‘아침형 인간이 되면 좋은 점 10가지’ 류의 자기계발서랑 뭐가 다른가. 새로운 만남, 돈 주고도 못 사는 경험, 낯선 환경에서 샘솟는 창의성, 그런 거 없어도 아무 문제 없다. 연애하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듯이 난 여행하지 않고도 잘 산다.
오히려 여행을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여기는 타인들의 생각이 스트레스다. 여행 꼰대들은 한발 더 나아가서 여행은 ‘해야 하는 것’이라며 등을 떠민다. 심한 경우 여행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며 매뉴얼을 들이밀기도 한다. 왜 당신이 선호하는 방식의 여행을 해야 하지? 아니, 애초에 왜 여행을 해야 하지? 슬슬 오기가 생긴다.
내게 여행은 일종의 노동이다. 준비부터가 만만치 않다. 여러 여행지를 후보에 올려놓고 맛집·숙소·교통편·꼭 가야 할 곳 등 열정적으로 정보를 긁어모아 플랜B, 플랜 C까지 짜는 건 일부 ‘능력자’들의 얘기다. 나 같은 여행 불능자는 너무 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헤맨다. 동행자가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신세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은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폐 끼치며 마음 불편한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다.
별 준비 없이 떠나는 ‘즉흥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게 진짜 여행의 묘미라며. 하지만 난 그 묘미에도 별다른 흥미를 못 느낀다. 큰맘 먹고 여행지까지 왔는데 맛없는 음식, 바가지 씌우는 숙박 시설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서울 안에도 가보고 싶은 맛집, 해보고 싶은 취미 활동들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왜?
심지어 겁도 많다. 외국 공항을 머릿속으로 그려 볼 때마다 영화 <테이큰> 의 공항 납치 장면이 저절로 떠오른다. 기우라는 건 알지만, 애써 두려움을 떨쳐가면서까지 여행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뭐든 억지로 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혹시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최민석 작가님에게 고민 상담 메일을 보냈다.(지난해까지「대학내일」에 연재되던 상담 코너다.) “여행을 싫어하면 이상한가요?”
그동안 45개 국 이상을 다녔다는 최민석 작가님은 본인이 생각하는 여행의 매력을 알려주셨다. “여행이 주는 ‘비일상성’ 은 일상적인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게 합니다.” 무릎을 탁 쳤다. 정확하다. 내가 여행하지 않는 이유와 정확히 일치한다.
비일상적인 곳으로 훌쩍 떠나기엔, 이미 일상이 너무 소중하다. 난 간간이 여행을 할 때마다 그곳의 ‘비일상성’에 금방 지쳤고,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일상을 그리워하곤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편안하게 잠들었던 내 방 침대, 추리소설을 읽으며 아이스커피를 마시기에 딱 좋은 집 앞 카페, 휴일 오전 슬리퍼 끌고 나가 혼자 보는 조조 영화. 낯선 곳에선 결코 누릴 수 없는 일상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여행하지 않는 것의 매력’이다.
“내 지식과 정보의 대부분은 전 세계를 여행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문화를 경험해서 얻은 게 아니라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얻은 것입니다.” 집순이·집돌이에게는 ‘여행 뽐뿌’보다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의 이런 말이 위로가 된다. 『사피엔스』 같은 책을 쓰지야 못했지만, 그래도 난 내 방식대로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시간이 없어 미뤄뒀던 책과 영화를 몰아 볼 때 뿌듯하고, 매일 같은 사람과 걸으며 지나치는 변함없는 풍경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아무 약속도 없는 주말의 빈둥거림이 곧 힐링이고, 조용한 방에서 멍 때리다가 인생의 모토가 될 한 줄을 떠올리기도 한다.
지난 겨울, 경북 봉화 산골짜기에 본가가 있는 친구가 집으로 초대를 했다. 평소 같았으면 거절했을 텐데, 그땐 그냥 괜찮겠다 싶어서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하루 종일 친구 집에서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런데 지금 기억나는 건 친구가 친구랑 마신 맥주가 아니라 그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다. 내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더니 그 후로 내가 근처에만 가면 배를 뒤집고 눕던 강아지. 하룻밤 자고 나니 역시 피곤해져서 금방 돌아왔지만, 아직도 강아지 배의 따뜻한 감촉을 떠올리면 썩 나쁘지 않은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여행이라면, 나도 좋아하게 될지 모른다. 또 언젠가 여행이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때까지는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일상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론 야박하게 들린다. 그렇다고 이 말을 처음 쓴『연애하지 않을 자유』의 저자인 이진송씨가 지인들의 연애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개인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게 연애인 만큼 오히려 먼저 묻고,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한다고 한다.
문제는 “연애는 당사자인 두 사람에게만 특별한 관계임에도 타인을 관객으로 동원하고 감정 노동을 요구” 한다는 데 있다. 하루 종일 애인 얘기만 늘어놓는 친구 앞에서 맞장구만 치다가 ‘내가 왜 이걸 듣고 있지?’ 싶었던 순간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내겐 여행 얘기가 그렇다. 몇 박 며칠로 어디에 가서 뭘 하다 왔다며 한껏 들떠서 친절히 사진까지 보여주는데, 사실 나로선 큰 감흥이 없다. 연애처럼 여행 역시 ‘당사자인 너에게만 특별한 기억’이니까. 그렇다고 “니 여행 니나 재밌지”라며 신나서 떠드는 사람의 입을 막지는 않는다. 그만큼 좋았나 보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았구나, 이해하고 만다.
재밌었다는 자랑, 또 가고 싶다는 푸념을 넘어 참견으로 이어지면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 해외에도 한 번 안 가봤느냐, 거기까지 가서 그건 왜 안 보고 왔느냐, 내가 해보니까 젊을 때 여행 많이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더라 등등.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 연애 한 번 안 해봤느냐, 연애는 하면서 결혼은 왜 안 하겠다는 것이냐, 내가 해보니까 젊을 때 연애 많이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더라 등등. “연애든 여행이든 내가 알아서 할게, 쫌!”
‘여행으로 얻을 수 있는 10가지’ 같은 기사도 일종의 꼰대질이다. ‘아침형 인간이 되면 좋은 점 10가지’ 류의 자기계발서랑 뭐가 다른가. 새로운 만남, 돈 주고도 못 사는 경험, 낯선 환경에서 샘솟는 창의성, 그런 거 없어도 아무 문제 없다. 연애하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듯이 난 여행하지 않고도 잘 산다.
오히려 여행을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여기는 타인들의 생각이 스트레스다. 여행 꼰대들은 한발 더 나아가서 여행은 ‘해야 하는 것’이라며 등을 떠민다. 심한 경우 여행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며 매뉴얼을 들이밀기도 한다. 왜 당신이 선호하는 방식의 여행을 해야 하지? 아니, 애초에 왜 여행을 해야 하지? 슬슬 오기가 생긴다.

내게 여행은 일종의 노동이다. 준비부터가 만만치 않다. 여러 여행지를 후보에 올려놓고 맛집·숙소·교통편·꼭 가야 할 곳 등 열정적으로 정보를 긁어모아 플랜B, 플랜 C까지 짜는 건 일부 ‘능력자’들의 얘기다. 나 같은 여행 불능자는 너무 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헤맨다. 동행자가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신세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은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폐 끼치며 마음 불편한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다.
별 준비 없이 떠나는 ‘즉흥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게 진짜 여행의 묘미라며. 하지만 난 그 묘미에도 별다른 흥미를 못 느낀다. 큰맘 먹고 여행지까지 왔는데 맛없는 음식, 바가지 씌우는 숙박 시설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서울 안에도 가보고 싶은 맛집, 해보고 싶은 취미 활동들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왜?
심지어 겁도 많다. 외국 공항을 머릿속으로 그려 볼 때마다 영화 <테이큰> 의 공항 납치 장면이 저절로 떠오른다. 기우라는 건 알지만, 애써 두려움을 떨쳐가면서까지 여행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뭐든 억지로 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혹시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최민석 작가님에게 고민 상담 메일을 보냈다.(지난해까지「대학내일」에 연재되던 상담 코너다.) “여행을 싫어하면 이상한가요?”
그동안 45개 국 이상을 다녔다는 최민석 작가님은 본인이 생각하는 여행의 매력을 알려주셨다. “여행이 주는 ‘비일상성’ 은 일상적인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게 합니다.” 무릎을 탁 쳤다. 정확하다. 내가 여행하지 않는 이유와 정확히 일치한다.
비일상적인 곳으로 훌쩍 떠나기엔, 이미 일상이 너무 소중하다. 난 간간이 여행을 할 때마다 그곳의 ‘비일상성’에 금방 지쳤고,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일상을 그리워하곤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편안하게 잠들었던 내 방 침대, 추리소설을 읽으며 아이스커피를 마시기에 딱 좋은 집 앞 카페, 휴일 오전 슬리퍼 끌고 나가 혼자 보는 조조 영화. 낯선 곳에선 결코 누릴 수 없는 일상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여행하지 않는 것의 매력’이다.
“내 지식과 정보의 대부분은 전 세계를 여행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문화를 경험해서 얻은 게 아니라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얻은 것입니다.” 집순이·집돌이에게는 ‘여행 뽐뿌’보다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의 이런 말이 위로가 된다. 『사피엔스』 같은 책을 쓰지야 못했지만, 그래도 난 내 방식대로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시간이 없어 미뤄뒀던 책과 영화를 몰아 볼 때 뿌듯하고, 매일 같은 사람과 걸으며 지나치는 변함없는 풍경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아무 약속도 없는 주말의 빈둥거림이 곧 힐링이고, 조용한 방에서 멍 때리다가 인생의 모토가 될 한 줄을 떠올리기도 한다.
지난 겨울, 경북 봉화 산골짜기에 본가가 있는 친구가 집으로 초대를 했다. 평소 같았으면 거절했을 텐데, 그땐 그냥 괜찮겠다 싶어서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하루 종일 친구 집에서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런데 지금 기억나는 건 친구가 친구랑 마신 맥주가 아니라 그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다. 내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더니 그 후로 내가 근처에만 가면 배를 뒤집고 눕던 강아지. 하룻밤 자고 나니 역시 피곤해져서 금방 돌아왔지만, 아직도 강아지 배의 따뜻한 감촉을 떠올리면 썩 나쁘지 않은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여행이라면, 나도 좋아하게 될지 모른다. 또 언젠가 여행이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때까지는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일상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
Illustrator 키미앤일이
#816호#816호 think#816호 대학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