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20대

연수, 다녀 오긴 했는데요 그래서 영어 말고 배운 건요?

연수는 다녀 왔고요, 멘탈만 수화물 없이 돌아왔습니다

01 나 이제 인천공항 안 울어



해외연수를 간다고 하니 동기들이 입을 모아 부럽다고 했다. 나름 경쟁률도 치열했기에 자부심도 생기고 많은 걸 배워오겠다는 다짐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쌌다. 짐을 싸고 여권을 챙기는 그 순간까진 나도 꽤 들떠 있었다. 그러나 연수의 진짜 시작은 짐을 들고 인천공항에 들어서는 순간부터였고,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공항은 ‘설렘’보다 ‘멘붕’에 가까운 공간이라는 것을.

나는 원래도 시간을 넉넉히 잡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집합 시간보다 2시간 일찍 도착했다. 문제는 그 ‘여유로운 2시간’ 이 전혀 여유롭지 않았다는 점이다. 짐은 무겁고 체크인 시간은 한참 남았고 어디 앉기도 애매했다. 불안한 마음에 여권을 다섯 번쯤 확인하고 나니 연수는 이미 시작된 것 같았다.

비행기 안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내 좌석은 창가 쪽, 그것도 통로에서 가장 먼 자리였다. 옆자리 분은 비행 내내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나는 무려 14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물도 못 마시고, 시차보다 더 큰 충격은 ‘움직이지 못함’에서 왔다. 그때 다짐했다. 다음부터는 반드시 비상구 쪽 좌석을 고를 거라고.


미국 연수를 갔을 때는 더한 일도 있었다. 입국 심사 때 공학 직원이 가리킨 곳이 아닌 엉뚱한 통로로 빠졌고, 그 순간 공항 직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No! This way!” 특히 미국은 총기 소지가 가능한 국가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식은땀이 줄줄 났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예기치 못한 상황이 겹치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이 낯선 공간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공항은 철저하게 깨닫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묵을 숙소는 없는데 폭설이 내려 비행기가 계속 연착되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되버렸다. 하마터면 40명 다같이 공항 노숙을 할 뻔했지만 계장님의 계속된 노력으로 하룻밤 더 묵을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공항도 몇 번의 연수를 거치고 나니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나만의 체크리스트도 생겼고, 공항 벤치의 단단함쯤은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더 이상 비행기에서 좌석을 잘못 골랐다고 크게 낙담하지 않는다. 입국 심사에서 길을 잘못 들어도 일단 숨을 고르고 다시 돌아가면 된다는 걸 안다.

이제 나는 인천공항에서 울지 않는다. 공항은 여전히 낯설고 변수가 많은 공간이지만, 그곳을 지나온 경험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설렘은 잠깐이고, 진짜 연수는 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02 팁 하나 안 줬을 뿐인데



캐나다 연수 초반, 나는 이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온갖 방식들을 몸으로 익혀야 했다. 이름하여 ‘캐나다 생존술’.

가장 먼저 부딪힌 건 식비였다. 캐나다 물가는… 솔직히 말해서 잔인했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이 가격이 맞나?” 싶었고, 한국에서 익숙하던 '1+1'은커녕 '2배 가격+세금+팁'이라는 현실만 마주했다. 한번은 식당에서 한국처럼 이것저것 시켰다가 계산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이럴 거면 그냥 즉석밥이랑 김 가져올걸…’ 이라는 후회가 몰려왔다.

그 후로 나는 기숙사 공용부엌의 충실한 이용자가 되었다. 밥솥 하나에 인생을 걸고, 누가 남겨놓은 김치 한 조각을 보고 감동했다. 냄비에 라면을 끓이는데 누군가 토마토소스를 넣어둔 걸 보고 이건 누구의 작품인지 감탄했을 정도다. 물론 가끔 전자레인지에 알루미늄 호일을 돌리는 초보자도 있었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함께 성장해갔다. 말 그대로 '요리로 하나 되는 국제사회’ 였다.


문화적 충돌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특히 팁 문화. 한국에선 팁을 주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계산기 화면의 ‘NO TIP’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천천히… 사장님의 눈이 나를 향해 돌아왔다. 그 침묵은 길고도 무거웠고, 나는 무언의 죄책감을 안은 채 가게를 나왔다. 그 이후론 무조건 15%를 기준으로 자동 계산했다. 팁은 돈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대가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소통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한번은 현금으로 계산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나와서 직원과 1분 동안 서로 눈만 마주치며 정적을 유지한 적이 있다. 나: ‘내가 먼저 말해야 하나?’ / 직원: ‘얘 카드 안 내네?’ / 나: ‘혹시… 현금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나?’ 결국 나는 손에 든 지폐를 흔들며 “May I pay in cash...?” 라고 말했고, 직원은 씩 웃으며 계산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나는 ‘눈빛으로 결제하기’라는 신기술을 터득했다.

이제 나는 기숙사 냉장고의 구조를 보면 어떤 나라 사람이 사는지 짐작할 수 있고, 식당에서 팁을 줄지 말지를 두고 망설이는 초보 유학생을 보면 속으로 힘내라고 응원한다. 캐나다에서 배운 생존술은 단순히 밥을 먹고 돈을 아끼는 방법을 넘어, 타인과 어울리고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법을 알려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NO TIP” 버튼은 절대 누르면 안 된다는 것도.

03 아이비리그 수업, 나만 멍하게 있는 거 아니잔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흔히 말하는 아이비리그.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긴장보다 기대가 더 컸다. 미국의 대학 수업은 어떨까, 내가 얼마나 따라갈 수 있을까. 하지만 막상 첫 수업이 시작되자, 내 머릿속에 남은 건 한 단어뿐이었다. 충격.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교수님은 이름 대신 애칭을 알려주셨다. “Just call me Andy!” 그 순간 나는 정신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냥 앤디라고 부르라니. ‘~교수님’이라는 호칭에 익숙했던 나는,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르는 데만도 시간이 걸렸다. 더욱 당황스러운 건 그 다음이었다. 수업 시작 종이 울리자마자 모두가 손을 들고 발언을 시작했다. “그래서 제 생각은요~”, “그건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교재? 없다. 그냥 질문, 질문, 또 질문이었다.

나만 멈춰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언제 끼어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 안에서 ‘왜 아무도 나를 안 시키지?’ 라는 초조함과 ‘시켰으면 큰일 날 뻔했다’ 는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야말로 말의 정글이었다.


수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어떤 학생의 말이 끝나자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한 장면이었다. “Great thought. Did anyone read it differently?” 그 한마디는 정답이 아닌 다른 시각을 묻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곳에선 정답보다 나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 틀리지 않는 것보다 다르게 보기가 가치 있는 문화라는 것.

물론 그걸 이해했다고 해서 당장 말을 잘하게 된 건 아니다. 여러 번 말문이 막혔고, 어떤 날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그냥 웃으며 넘어가자고 결심했던 순간도 있다. 때론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타이밍을 잡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마저도 나의 방식이라는 걸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다.

마지막 수업 날, 교수님은 강의실에 직접 주문한 뷔페를 차려놓고 우리를 맞이하셨다. “이 수업을 함께 만든 건 여러분이에요” 라는 말과 함께. 그때 느꼈다. 말보다 태도, 지식보다 관점, 교수보다 동료 같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느새 질문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는 것을.

질문을 왜 해도 되는지 몰랐던 내가 질문을 해야만 했던 순간은 단순한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서 나의 생각을 드러내는 용기와 연습의 과정이었다. 내가 한 문장을 말하는 동안 수많은 시선이 나를 향했지만 이제는 그 시선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곳에서 나는 먼저 고개를 들고 나를 드러내는 법을 배웠다.

04 사실 영어보다 더 어려웠던 건 나를 돌보는 거였다



해외연수를 갈 때마다 나에게 빠지지 않는 준비물이 하나 있다. 여권도 아니고 전자사전도 아니다. 바로 약통이다. 그 안에는 감기약, 소화제, 해열제, 그리고 타이레놀 등 온갖 약들이 들어있다. 이제는 거의 반사적으로 챙기게 되는 이 약통은 내가 해외에서 얼마나 자주 아팠는지를 증명하는 작은 생존 키트다.

연수 일정은 항상 빡빡했다. 오전에는 강의, 오후엔 팀플과 토론, 저녁에는 견학과 투어까지. 이상하게도 나는 매번 컨디션이 무너졌다. 처음엔 환경 탓을 했다. 시차 때문인가? 밥이 안 맞아서 그런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체념했다. “아, 또 이 타이밍에 아플 때가 됐구나.”

하지만 정작 가장 힘들었던 건 아픈 몸보다 그 누구도 나를 챙겨주지 않는 환경이었다. 낯선 도시, 낯선 언어, 낯선 병원. 병원비는 상상 이상이었고, 약국조차 어색했다. 결국 내가 기댈 수 있었던 건 한국에서 가져온 타이레놀 몇 알뿐이었다.

밤에 혼자 기숙사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딸, 많이 힘들었겠다.” 그 한마디가 이렇게 간절할 줄 몰랐다. 하지만 이번엔 전화도 하지 않았다. 그냥 스스로 챙겨야 할 것 같았다. 이젠 내가 나를 돌봐야 할 차례라는 걸 나는 처음으로 정말 깊이 실감했다.


그 후로 나는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일정을 조율했다. 억지로 무리해서 나가지도 않았고, 자유시간에도 같이 놀러가자는 언니오빠들의 말에 먼저 들어가 쉰다고 답했다. 밥도 아무거나 먹지 않았고 혼자서 쉴 수 있는 시간을 일부러 만들었다. 처음엔 그것조차 너무 미안했다. 마치 내가 공동체에서 이탈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나를 챙기는 일이 곧 남을 존중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거절하는 용기’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않고, 멈출 줄 알고,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어쩌면 그게 어른이 되는 첫 번째 단계 아닐까.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챙기기 위해 선택하는 조심스러움.

이제 나는 해외에 나갈 때 약을 챙기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여유 한 조각도 챙긴다. 그건 물리적인 약보다 더 오래, 더 깊게 나를 지켜주는 진짜 회복의 기술이다.

05 그래서 영어는 늘었나요?



연수를 다녀왔다고 하면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영어는 늘었어?” 이 질문은 언제 들어도 조금 웃기다. 누가 보면 내가 2주 만에 CNN 앵커처럼 말하게 된 줄 알겠다. 하지만 가만 보면 이 질문 속엔 그 시간 동안 뭐가 달라졌냐는 물음이 담겨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에 이제야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어 실력? 솔직히 말하자면 엄청 늘진 않았다. 여전히 말문이 막힐 때가 있고, 리스닝은 가끔 영화 자막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틀려도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생겼다. 누가 웃을까봐 조심하던 내가, 이제는 엉터리 문장이라도 일단 던져본다. 틀린 말보다 더 무서운 건, 아예 말하지 않는 침묵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또 하나는 혼자 있어도 괜찮아졌다는 자신감이다. 연수 초반에는 늘 누군가와 붙어 있어야 안심이 됐다. 식당에서도, 수업에서도, 심지어 기숙사 복도에서도. 그런데 어느 순간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어딘가에 가는 일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나 자신과 더 가까워졌고, 그래서인지 사람들과도 더 편하게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마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것일지도 모른다. 진심은 언어보다 깊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는 것. 엉터리 영어로도 친구가 생겼고 웃긴 제스처 하나로도 누군가와 공감할 수 있었다. 말보다 눈빛이, 문법보다 태도가 더 중요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건 어느 교재에도 나오지 않는 진정한 배움이었다.

연수는 정답이 없는 경험이었다. 매일이 질문 같았고, 가끔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조차 헷갈렸다. 그런데 그 모호함 속에서 나는 나를 더 많이 보게 되었다. 불완전하고 때로는 유치한 내가, 그래도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실수하고 웃고 때로 울기도 하면서 조금 더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어는 늘었나? 조금은 늘긴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는 건, 세상을 향한 내 시선과 나를 대하는 방식이다. 그건 시험 점수로는 절대 측정할 수 없는 변화이니 말이다. 

#해외연수#에세이#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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