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나의 '제철 문장'은?




E. 평소 시를 즐겨 읽는 걸로 알고 있다. 시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좋아한다고.
A. 맞다. 흔히 시적 허용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이 경우에 정확히 들어맞진 않지만(웃음). 시가 그리는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활자를 읽는 게 아니라 행간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기분이 든다. 시가 가진 자유와 확장성이 좋다. 어디든 다다를 수 있고, 무엇이든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어떤 슬픔과 좌절 앞에서도 말이다.
E. 가을 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나? 특히 읽으며 용기를 얻었던 시가 궁금하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멀리서 빈다」, 나태주
A. 나태주 시인의 <멀리서 빈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마치 내가 시를 찾아 읽는 게 아니라, 시가 나를 찾아와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특히 가을에 이 시를 읽더니, 시가 주는 울림이 배가 되더라. 그만큼 직접적으로 와 닿아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로부터 덤덤하게 진심이 가득 담긴 위로를 받으면, 나를 괴롭게 했던 그 모든 사건과 감정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게 바로 '용기'인 것 같다. 대단하고 분명한 결심이 아니라, 여전히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다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E. 위로에서 피어나는 용기. 그런 순간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도 같다. 희망을 품은 사람은 다시금 그런 단단하고도 따스한 위로를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을 것도 같고. 아름다운 선순환이다. 이런 게 바로 시가 가진 힘이자 매력인 것 같다.

E. 대학에 들어와서 많이 방황했었다고 들었다. 무엇이 특히 불안하고 어려웠는지 궁금하다.
E. 그런 불안정한 시기를 통과해 무사히 지금에 이르지 않았나. 어떻게 그 시기를 지나올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B. 사실 그땐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랐고, 그렇게 가만히 기다리다 보니 지나갔다.
이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히,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라는 괴테의 문장을 읽게 되었다. 이 문장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그동안 사소한 실수와 실패에도 크게 무너졌던 이유는, 스스로가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니구나.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고 또 잘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의 모자란 모습에 그렇게 괴로웠던 거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거치면서, 부족하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과거의 나를 긍정하고 보듬어줄 수 있었다.

C. 맞다. 그런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사실 난 기록에 대한 강박이 있는 편이다. 특히 스위스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할 때의 나는, 매 순간 흘러가는 시간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감각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을 자주 느꼈다. 좁지만 안락한 방을 벗어나 몇 걸음만 걸어 밖으로 나가면 눈앞에 설산과 바다 같이 넓은 강이 펼쳐졌다. 그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종종 무기력과 외로움을 느끼며,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책만 읽는 나 자신이 엄청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점 더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과 마음에 와닿는 순간들을 글과 사진으로, 강박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의 아름답고 소중한, 다시 오지 않을 순간-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같은 마음과 태도로 마주할 수 없을 풍경-앞에서도 카메라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불완전한 방식으로만 현재를 감각하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어리석게 느껴져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눈에만 살며시 담아본다. 방해하지 않고, 소리 내지 않고.그것은 주목을 바라지 않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일이다.나중에 꺼내 볼 마음까지도 그 순간에 다 쏟아버리는 것이다.나는 때때로를 놓침에 기뻐한다. 그리고 실감한다.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기록되지 않았음을.『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유지혜
C.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스위스에 있을 때 가만히 앉아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그리고 그때 이 문장을 처음 알게 됐다.
이 문장을 읽으며, 비워내고, 덜어내고, 흘려보내는 일이 오히려 그 안을 더 큰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과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흘려보내는 것이 오히려 그 순간을 온전히 감각하고 만끽함으로써, 눈앞의 대상이 갖는 아름다움을 존중하는 방법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소 다른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이후로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여백을 남겨두는 마음으로, 더 따스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의 공간을 마련해 두는 넉넉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기록에 대한 집착과 강박을 조금씩 덜고, 순간에 충실할 때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을 눈에 더 자주 담을 수 있었다.
E. 이 말을 들으니, 때로는 가만히 흘려보내는 아름다움도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