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20대

올가을 나의 '제철 문장'은?

- 용기와 위로를 주는 문장에 대하여

가을, 높고 공활한 하늘만큼이나 마음 한편이 텅 빈 듯 허전하고 쓸쓸해지는 계절이다. 
이런 날이면 왠지 공허한 마음을 채우는 단단한 활자와 메마른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가을 단비 같은 문장이 간절해진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그래서인지 가을의 초입인 9월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레 책, 문장, 독서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고 입안에서 한 번쯤 굴려보게 된다. 그러곤 독서를 이 계절의 목표로 삼기도 한다.
그런 우리에게, 계절마다 다정한 문장으로 너른 위로는 주는 존재가 있다. 바로, ‘광화문 글판’이다.



누군가는 광화문 거리를 거닐다 글판을 마주쳤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SNS 속 이미지로 접했을 것이다. ‘광화문 글판’은 매 계절,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꾸준하고 다정하게 이 계절의 냄새와 온기를 담은 ‘제철 문장’을 내어준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문장을 마음에 품고 계절을 난다.



9월은 여름의 열기가 가라앉고, 가을과 함께 조금은 차분한 마음으로 새 학기를 맞이하는 시기다.
바로 이때, 이번 가을을 덜 쓸쓸하고 더 다정하게 보낼 수 있도록, 각자의 마음속에 글판을 세워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하고 조급해지는 이때, 단단한 온기를 주는 문장을 품고 지낸다면 그보다 든든한 동반자는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나의 언어로는 차마 다 표현하지 못했던 해묵은 감정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고, 섬세한 언어로 단단한 용기와 아름다운 위로를 전하는 문장에 관해, 글과 대화를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Editor는 'E', Interviewee 세 명은 각각 A, B, C로 칭한다.)



#1.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멀리서 빈다」, 나태주
(조** / 서울 소재 H대 / 국어국문학과 / 4학년 / 23세)



E. 평소 시를 즐겨 읽는 걸로 알고 있다. 시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좋아한다고.

A. 맞다. 흔히 시적 허용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이 경우에 정확히 들어맞진 않지만(웃음). 시가 그리는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활자를 읽는 게 아니라 행간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기분이 든다. 시가 가진 자유와 확장성이 좋다. 어디든 다다를 수 있고, 무엇이든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어떤 슬픔과 좌절 앞에서도 말이다.


E. 가을 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나? 특히 읽으며 용기를 얻었던 시가 궁금하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멀리서 빈다」, 나태주

A. 나태주 시인의 <멀리서 빈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마치 내가 시를 찾아 읽는 게 아니라, 시가 나를 찾아와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특히 가을에 이 시를 읽더니, 시가 주는 울림이 배가 되더라. 그만큼 직접적으로 와 닿아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로부터 덤덤하게 진심이 가득 담긴 위로를 받으면, 나를 괴롭게 했던 그 모든 사건과 감정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게 바로 '용기'인 것 같다. 대단하고 분명한 결심이 아니라, 여전히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다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E. 위로에서 피어나는 용기. 그런 순간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도 같다. 희망을 품은 사람은 다시금 그런 단단하고도 따스한 위로를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을 것도 같고. 아름다운 선순환이다. 이런 게 바로 시가 가진 힘이자 매력인 것 같다.




#2.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 『파우스트』, 괴테
(이** / 서울 소재 K대 / 생명공학부 / 4학년 / 25세)




E. 대학에 들어와서 많이 방황했었다고 들었다. 무엇이 특히 불안하고 어려웠는지 궁금하다.


B. 내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졌다. 가뜩이나 본가가 서울이 아닌 지방이라 1학년 땐 정말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결국 대학 적응에 완벽하게 실패하고 도망치듯 1년 휴학을 했다. 22년에 다시 복학해서 처음으로 학교를 실제로 다니니까, 학업이나 대인관계를 비롯해, 학교생활이란 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학교에 처음 입학한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렸고, 매일매일 길이 달라지는 미로를 홀로 헤매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주변을 보며 다들 알아서 척척 잘하고 행복하게 대학 생활을 즐기더라. 오로지 나만 바보 같고, 저 멀고 깊은 곳에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 들어 자주 움츠러들었다. 스스로의 부족함에 걸려 넘어지고, 넘어진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만 하던 시기였다.


E. 그런 불안정한 시기를 통과해 무사히 지금에 이르지 않았나. 어떻게 그 시기를 지나올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B. 사실 그땐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랐고, 그렇게 가만히 기다리다 보니 지나갔다. 

이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히,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라는 괴테의 문장을 읽게 되었다. 이 문장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그동안 사소한 실수와 실패에도 크게 무너졌던 이유는, 스스로가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니구나.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고 또 잘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의 모자란 모습에 그렇게 괴로웠던 거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거치면서, 부족하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과거의 나를 긍정하고 보듬어줄 수 있었다.



E. 되돌아보면,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정말 심각하게 여긴 사건도,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실패의 후유증도 어느새 다 잊혔다. 그보다는 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내가 기울였던 노력,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그런 시도와 몸짓들이 마음의 근육이 되어 현재의 나를 만드는 것 같다.




#3. "나는 때때로를 놓침에 기뻐한다. 그리고 실감한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기록되지 않았음을."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유지혜
(강** / 서울 소재 S대 / 경영학과 / 3학년 / 23세)


E. 필름 사진 촬영이 취미라고 들었다. 카메라를 들고, 담고자 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신중하게 셔터를 눌러 한 장의 사진을 찍기까지의 과정은 고민의 연속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과정이 괴롭거나 힘들게 느껴질 때는 없었나?

C. 맞다. 그런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사실 난 기록에 대한 강박이 있는 편이다. 특히 스위스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할 때의 나는, 매 순간 흘러가는 시간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감각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을 자주 느꼈다. 좁지만 안락한 방을 벗어나 몇 걸음만 걸어 밖으로 나가면 눈앞에 설산과 바다 같이 넓은 강이 펼쳐졌다. 그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종종 무기력과 외로움을 느끼며,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책만 읽는 나 자신이 엄청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점 더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과 마음에 와닿는 순간들을 글과 사진으로, 강박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의 아름답고 소중한, 다시 오지 않을 순간-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같은 마음과 태도로 마주할 수 없을 풍경-앞에서도 카메라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불완전한 방식으로만 현재를 감각하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어리석게 느껴져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E. 선명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기록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순간을 온전히 감각하고 머릿속에 새기지 못하는... 공감되는 부분이 정말 많다. 지금은 그런 고민과 강박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는지 궁금하다.


눈에만 살며시 담아본다. 방해하지 않고, 소리 내지 않고. 
그것은 주목을 바라지 않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일이다. 
나중에 꺼내 볼 마음까지도 그 순간에 다 쏟아버리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를 놓침에 기뻐한다. 그리고 실감한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기록되지 않았음을.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유지혜

C.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스위스에 있을 때 가만히 앉아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그리고 그때 이 문장을 처음 알게 됐다.

이 문장을 읽으며, 비워내고, 덜어내고, 흘려보내는 일이 오히려 그 안을 더 큰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과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흘려보내는 것이 오히려 그 순간을 온전히 감각하고 만끽함으로써, 눈앞의 대상이 갖는 아름다움을 존중하는 방법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소 다른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이후로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여백을 남겨두는 마음으로, 더 따스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의 공간을 마련해 두는 넉넉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기록에 대한 집착과 강박을 조금씩 덜고, 순간에 충실할 때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을 눈에 더 자주 담을 수 있었다.


E. 이 말을 들으니, 때로는 가만히 흘려보내는 아름다움도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계절의 초입마다, 그 계절에 어울리거나 닮고 싶은 태도를 담은 문장을 찾아 읽으며 마음을 단단히 다지는 습관이 있다. 그렇게 살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문장들은 나의 두터운 기반이 되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올가을, 나는 어떤 문장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져봤으면 좋겠다.

계절을 대하는 태도는 종종 한 문장에서 비롯된다. 
그 문장으로부터 용기를 얻고, 그 힘으로 마음을 지탱한다.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과 생각을 섬세한 언어로 대신 말하고 따뜻한 용기와 위로를 건네는 문장을 품고 있으면, 어떤 마음의 추위와 더위도 두렵지 않다.

이 글은 바로 그런 문장을 찾고, 곱씹고, 나누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각자가 고른 ‘제철 문장’은 올가을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세우고 다지는 작은 깃발이자, 품 안에 스며드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을 울린 문장을 나누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다정한 위로의 손길을 느끼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잊고 있던 용기를 되찾을지도 모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인생의 역사』에 이렇게 적었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이 지면이 독자들이 가을을 읽고, 거닐고, 느끼며, 이 계절뿐만 아니라 삶을 지탱해 주고 마음을 환히 비춰줄 문장을 만나는 다정한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가을#위로#용기#문장#책#나태주#괴테#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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