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담은 오래된 상자
내 방 한켠에 놓여있는 오래된 상자 속에는 지금까지 내가 받은 수많은 편지들이 들어있다. 오래되어 색이 노랗게 바랜 편지, 삐뚤빼뚤 서툰 글씨로 써내려간 편지, 색연필로 예쁘게 꾸민 편지, 지우개 자국이 번져 지저분해진 편지. 새하얀 종이에 내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눌러쓴 흔적들을 볼 때면 나는 문득 감사함을 느낀다. 내가 과분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에, 그리고 나에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에. 편지에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그 과정 속에서 함께한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 적혀 있다. 그런 말들을 곱씹을 때면 나는 또 한 번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수십장이 넘는 종이들은 그 모양이나 글씨,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지만 모두 나에게 소중한 기억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해준다.
첫 번째 편지
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며 엄마와 친한 사람들이 보내준 편지이다. 물론 내가 태어나던 순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의 첫 순간이 담긴 편지인 만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세상에 태어난 나는 늦둥이였다.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지 9년만에 태어난 늦둥이. 그렇기에 나의 탄생은 그들에게 더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었을까? 엄마의 품에 안겨 작은 손가락이나 꼼지락대던 내가, 당신들에게 해준 것 하나 없음에도. 그저 태어난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반듯하게 휘갈겨쓴 편지에서 느껴지는 사랑이, 나의 탄생을 축복하는 말들이 너무나도 감사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들의 얼굴을 본적도, 그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지만 가끔 편지를 볼 때마다 상상해보곤 한다. 울산에 계신 선생님들을, 상현동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을. 그들의 눈가에 깊이 새긴 주름을 쓸고 그들의 귀에 가만히 속삭여본다. 보잘것 없는 나를 사랑해주셔서, 축복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이다.
두 번째 편지
내가 처음으로 엄마에게 받은 편지이다. 중학교 가정 시간, 선생님께서는 어버이날을 맞아 우리 부모님의 손 사진을 찾아보고 편지를 쓰는 행사를 준비하셨다. 처음에는 헷갈려하던 아이들은 금세 하나, 둘 부모님의 손 사진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진을 찾아내었을 때 쯤 교실은 제각기 부모님이 써주신 편지를 읽느라 잠시 조용해졌다. 내가 찾은 엄마의 손 사진 뒤에도 편지가 써 있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 세상은 온통 별빛이었다고.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한참을 울던 나는 뿌연 눈 앞을 닦아내고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컴퓨터로 쓰여진 딱딱한 글씨들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엄마에게 나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특별한 존재라는 말이 좋았다.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보다 많이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이 좋았다. 그때 나는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터라 편지를 읽고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말씀 드리지 못했던 말을 이제서야 해본다. 정말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내가 엄마에게 특별한 존재인만큼 엄마도 나에게 그러하다고.
세 번째 편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겨울방학마다 방문한 미국 학교의 친구들과 선생님이 써준 편지들이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국제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사귄 친구 중 한 명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며 나를 초대하였다. 미국의 겨울방학은 한국과 달라 2주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친구를 따라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엄마 없이, 그것도 가까운 곳이 아닌 미국으로 가게 된 나는 걱정이 많았다. 친구들이 나를 싫어할까봐, 엄마가 보고싶을까봐. 어린 마음에 든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친구들은 나를 잘 챙겨주었고 그렇게 나는 매년 겨울방학마다 미국에 있는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마다 편지를 써주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중학교, 고등학교. 학년이 점점 올라갈수록 반듯해지는 친구들의 글씨체도, 가끔씩 보이는 서툰 안녕이라는 한글도, 전학을 갔는지 어느 순간부터 편지에서 보이지 않는 친구의 이름도 지금은 잠시 상자 속에 담아 두었지만 언젠가 그들과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다면 학창시절을 추억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주변에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받은 사랑만큼 그들을, 더 나아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에게 기쁨을 주고, 나를 축복해준 그들이 그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어 그들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사랑을 꾹꾹 눌러담아,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