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를 읽는 패션 문외한
공강에는 도서관으로 달려가 <보그> 잡지를 펼치고, 지루할 때면 <보그> 웹사이트에 들어가고, 글이 읽고 싶을 때면 <보그>의 ‘뷰 포인트’ 섹션을 훑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그>를 보는 나는 패션 문외한이다.
1년 치 <보그>. 패션을 공부하지는 못했고, 글은 많이 읽었다. 매일 패션지를 보면서 패션을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글만 읽으니까.
1년간 <보그>를 구독했다. 매달 두꺼운 페이지의 잡지가 한 권, 어떤 달은 세 권까지 집 앞으로 배달됐다. 특히 패션위크를 담은 1월 호와 9월 호는 그 양이 어마어마해 솔직히 말하자면 읽지 않은 페이지도 꽤 된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러니까 <보그>를 구독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일 테니 글만 적힌 페이지를 보지 않고 넘기겠지만, 나는 새로운 컬렉션을 찍은 사진들만 있는 페이지들을 통째로 넘겨버린다. 편집장의 말이 적힌 ‘프런트 로우’와 ‘뷰 포인트’만 매호 놓치지 않고 챙긴다. 각 호의 최애 글도 둘 중 하나에서 주로 결정된다. 컬렉션은 그냥 넘기면서 디자이너 인터뷰는 읽어본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언제나 가장 큰 관심사고, 그중에서도 성공한 이들의 스토리는 늘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연예인 인터뷰는 잘 안 읽는 편이지만, 배우 인터뷰는 그 배우를 알든 모르든 빠트리지 않고 읽는다. <보그>만큼 연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연기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태도를 읽고 나면 괜히 경건한 마음으로 공연이나 영화를 보게 된다. 후기글의 내용도 더욱 탄탄해지니 일거양득이다. 그러니까 패션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보그>를 구독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보그>에 실리는 글의 퀄리티가 좋아서다.
패션지라고 해서 패션만 논하는 것은 아니다. 패션•뷰티•연예•문화•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매달 취재하고 소개한다. 일상과 트렌드에 대한 에디터의 개인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섹션도 있다. 패션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잡지를 꽤 좋아한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갈망하는 것들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잡지에는 희망이 가득하다. 표지에는 아름다운 슈퍼모델이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고, 표지를 넘기면 반짝이는 시계와 화려한 꾸뛰르 하우스의 사진이 인사한다. 페이지를 한 장 넘기면 프런트 로우에서 편집장이 이번 호를 준비하며 느낀 것들을 세련된 문장들로 늘어놓고, 또 페이지를 넘기면 목차들과 함께 잡지를 만든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름이 나온다. 그 이름들을 쭉 훑으며 재능 넘치는 사진작가들을 알아가기도, 여러 부서 중에서 내가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곳을 골라보기도 한다. 본격적인 첫 글에 들어가기 전부터 읽을 것이 넘쳐난다.
좋은 점은 아무리 화보 사진들을 건너뛰더라도 어쨌든 패션지이기에 관련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나단 앤더슨의 디올,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프라다와 미우미우를 이끄는 미우치아 프라다 여사까지. (사실 이 문장을 쓰면서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제대로 썼는지 검색해 봤다. 나는 조나단 앤더슨보다 뮤지컬 <렌트>를 쓴 조너선 라슨이 더 익숙한 사람이다) 나름 큰 화두에 관해선 대화할 수 있다. 수박 겉핥기 정도. 아직 큰 문제는 없었다. 우선 대화가 시작되고 나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선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며 회피할 수 있으니까, 나의 무지함을 어느 정도 숨길 수 있다. 그래도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미국 <보그>의 뉴스레터와 <BOF>의 뉴스레터를 구독했다. 패션지를 읽는 사람은 패션에 대해 잘 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나름의 배려로 말이다. 이러한 노력이 그다지 도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방금 가장 최근에 본 패션계 소식을 떠올리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가끔은 고민에 잠기기도 한다. 그래도 명색이 <보그> 독자인데, 디자이너와 하우스에 대해 자세히 공부해 봐야 할까? 흠....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컬렉션과 요즘처럼 디자이너가 빠르게 교체되는 시기에 공부를 시작하는 게 맞을까? 과연 얼마나 외울 수 있으려나. 아마 하우스 이름들만 겨우 알게 되겠지. 그때도 조나단 앤더슨만 외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패션에 관심이 없어서 문외한인 게 아니라, 패션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를 몰라서 문외한이다. 브랜드가 넘쳐난다. 주변에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꾸뛰르 하우스는 당연하고, 국내외 유망한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전부 꿰고 있다. 그 많은 브랜드를 외운 것에 대한 경외감까지 들 정도다. 게다가 유명하지 않은 브랜드들은 어떻게 찾은 거지? 며칠 전, 아르바이트를 찾아보다가 한 옷 가게에서 올린 공고를 봤다. 가장 최근에 즐겨 입은 브랜드 3곳을 적어 제출하란다. 3곳이나? 나는 머리를 싸매봐도 겨우 2곳이 전부인데. 그것도 한 곳은 H&M이다.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 같다. 그래서 좋다. 배울 점이 넘쳐나니까. 패션은 물론 앞서 말한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창의력 넘치는 디자인과 화려한 패션쇼, 예술에 대한 대담한 도전들과 뛰어난 글쓰기 실력까지. 나는 <보그>를 싫어하는 방법을 모른다. 이 정도면 <보그>의 애독자라고 자신 있게 나를 소개해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