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엔 다들 조금 있어 보이고 싶어진다
스무 살이 되면, 나를 설명하는 단어도 달라질 줄 알았다.
성적 대신 취향, 성과 대신 정체성 같은 것들로 말이다.
그래서 입시가 끝난 뒤 처음 맞는 한 해의 목표는 꽤 그럴듯했다.
‘나의 취향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그러나 이 글은 취향을 잘 고르는 법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엉성하게 시작해도 괜찮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처음부터 확고하지 않아도,
조금 허세가 섞여 있어도,
그렇게 시작한 취향도 결국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목표를 가장 빠르게 실천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있어 보이는 취향을 하나쯤 장착하는 것!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영화 동아리에 가입한 이유도 사실 거창하지 않았다.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냥, 그랬다.
개강총회 뒤 뒷풀이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코스가 있다.
바로 ‘인생 영화’ 이야기.

테이블 위에는 누벨바그, 쿠엔틴 타란티노, 미장센, 핍진성 같은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굴러다녔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 밀도 높은 대화는 멋있었지만,
동시에 쉽게 끼어들기 어려웠다.
그 순간,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위대한 쇼맨〉이라는 사실을
말하기까지 꽤 많은 망설임이 필요했다.
단순히 취향을 말하는 자리인데도,
괜히 시험을 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스스로를 ‘뮤지컬 덕후’라 부르며
작품과 배우, 넘버를 줄줄 꿰고 다녔다.
그때의 나는 분명 내가 아는 만큼,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있어 보이는 나’에게 취해 있었다.
지금 와서야 인정하지만
그 안에는 꽤 순도 높은 지적 허영심이 섞여 있었다.

책은 너무 얇아도, 너무 두꺼워도 곤란하다. '생각 좀 해봤을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적당히 묵직해야 한다.
제목은 철학적일수록 좋다.
상업영화 대신 독립영화를 고르고,
끝까지 읽지 못할 걸 알면서도 세계문학전집을 펼쳐 드는 선택들.
그 모든 결정의 바닥에는
‘이렇게 보이고 싶다’라는 마음이 있었다.
취향이 곧 나의 수준처럼 느껴졌던 시기.
20대 초입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 마음은 꽤나 익숙하다.
지루함을 참고 페이지를 넘기기도 했고,
이해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졸기도 했다.
그럼에도 책을 덮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그런 책을 읽고 있는 ‘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허영으로 시작한 선택들이
어느 순간 진짜 취향이 되어 있었다.
카프카와 헤세, 빅토르 위고를 골라 들던 시간은
대학에 와서 ‘유럽문화기행’, ‘동양철학의 이해’,
‘연극과 뮤지컬’을 자연스럽게 수강하는 나로 이어졌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각색하는 팀 프로젝트에서,
이미 읽어본 작품 덕분에
망설임 없이 선택지를 고르는 나를 보며 깨달았다.
무심코 쌓아온 장면과 문장들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을.
처음에는 있어 보이고 싶어서 시작했을지라도,
그 선택이 정말 내 것이 되는 순간은 결국 찾아온다.
취향은 증명해야 할 자격증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쌓이는 기록에 가깝다.
🌸맞아요!🌸
그래서 다시 그날의 테이블로 돌아간다면,
이제는 〈위대한 쇼맨〉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다.
누벨바그를 몰라도,
미장센을 유창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다.
어떤 취향은 오래 남고,
어떤 취향은 스쳐 가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얼마나 ‘고급’한지가 아니라
나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락했는가다.
평론가 이동진이 말하는 지적허영심취향은 나를 증명하기 위한 명함이 아니다.
시간을 들여 쌓아온 기록에 가깝다.
그러니 너무 잘 고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허세가 섞인 시작이어도,
끝까지 해내지 못해도,
그 경험은 결국 당신 쪽으로 남는다.
취향은 그렇게 만들어진다!